TOTAL : 25 PAGE : 1/1

추도예배나 조문의 경우 신앙인으로써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1. 장례식 조문 시 영정 사진 앞에서 기도와 헌화
조문은 떠나간 고인에게 예를 다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조문을 갔을 때, 그 나라의 법과 풍습에 결례되거나 벗어나지 않도록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가령,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헌화하는 것은 일종의 조문에 대한 예의요, 고인의 가족들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상과 귀신 앞에 머리를 숙이며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분위기와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며, 고인의 가족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 앞에 가한 것입니다. 더불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라고 그 기도는 죽은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기에 죄가 되지 않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장례 절차가 주 안에서 형통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또 혹여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면 이 기회를 통해 전도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지요.
성도님들 중에, 다른 교회에서 나온 간증을 듣고, 거기에 어느 종교의 머리가 지옥에서 자신에게 헌화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고 질문을 하셨는데, 여기서 그 머리가 헌화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헌화하는 그 행위 때문이 아니라, 헌화하는 사람들이 자기 종교의 머리를 우상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헌화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종교의 머리는 이미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상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고, 따라서 자기 종교의 머리를 우상시하는 마음에서 헌화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2. 만약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은 사람,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조문 시 어떻게 기도하는가?
(당회장님 '85년 7월7일 우상과 제물' 설교 中)
이방인들이 볼 때 이상히 보거나, 핍박할 수 있으므로 소리 내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 속 중심으로 묵상 기도를 하면 되는데, 이때 무릎을 꿇고 해도 되고, 서서해도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설령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해도 이는 죽은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고, 또 이러한 행위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법도에 맞게 예를 갖추어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가족들에 대한 배려와 예의이기도 하구요.
이때 기도할 내용은, 먼저 원수마귀 물리치는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원수마귀 다 물리쳐 주시옵소서.', 다음은 가정복음화와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영혼들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하시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중심을 다해 아버지께 기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3. 추도예배
최근 어느 교회 목사님의 설교 중 '추도 예배도 우상 숭배'임을 지적. 일부 목회자들도 추도예배를 '죽은 사람과 그의 혼령을 대상으로 기리고 애도하는 예배'라 규정하고 명백한 우상숭배의 행위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제사는 그 형식과 절차에 있어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나 조상을 섬긴다는 명목아래 절을 합니다. 이는 그 마음을 내어주고 빼앗기는 것이므로 귀신이나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추도예배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므로, 불가하다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조문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추도예배 또한, 고인의 가족들의 위로와 위안을 삼고자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에 불가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추도예배의 목적이 남은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하도록 은혜를 나누기 위한 것이며, 혹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해도 그들 역시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만약 믿지 않는 가정이나, 믿지 않고 죽은 고인을 위해 추도예배를 드릴 때는 그 예배의 의미를 알려주고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죽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고 죽은 사람이든 '죽은 사람 앞에 상을 차리는 것'은 귀신 앞에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예배는 이와 다르다는 것을 미리 설명해 주어야 하지요.
이처럼 진정한 의미를 알고 예배를 드리므로, 믿지 않는 자들이 그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가족들이 함께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죽은 사람이든,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든 그 가정에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하여도 이를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오히려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하늘의 소망이 있으므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4. 예배 시 함께 상을 차리는 것에 대해.
상을 차려놓고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 상에 성경을 올려놓으며, 예배의 격식에 맞추어 드려야 합니다. 예배 후에 상을 차려 식사를 하도록 하면 되지요. 즉, 예배는 따로 드리고 다 마치고 난 후 상을 차리되 제사의 형식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정겹게 식사하며 서로 신앙의 격려를 하며 우애를 다지는 자리로 마련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마음이 중요한데, 그렇다고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은 상관없이 행위적인 것만 가지고 옳다 그르다, 그것도 자기 기준에 말해서는 안됩니다. 영의세계란 내가 아는 한계를 넘어 얼마든지 무한하다는 사실입니다.

조문은 떠나간 고인에게 예를 다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조문을 갔을 때, 그 나라의 법과 풍습에 결례되거나 벗어나지 않도록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가령,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헌화하는 것은 일종의 조문에 대한 예의요, 고인의 가족들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상과 귀신 앞에 머리를 숙이며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분위기와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며, 고인의 가족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 앞에 가한 것입니다. 더불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라고 그 기도는 죽은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기에 죄가 되지 않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장례 절차가 주 안에서 형통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또 혹여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면 이 기회를 통해 전도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지요.
성도님들 중에, 다른 교회에서 나온 간증을 듣고, 거기에 어느 종교의 머리가 지옥에서 자신에게 헌화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고 질문을 하셨는데, 여기서 그 머리가 헌화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헌화하는 그 행위 때문이 아니라, 헌화하는 사람들이 자기 종교의 머리를 우상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헌화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종교의 머리는 이미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상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고, 따라서 자기 종교의 머리를 우상시하는 마음에서 헌화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2. 만약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은 사람,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조문 시 어떻게 기도하는가?
(당회장님 '85년 7월7일 우상과 제물' 설교 中)
이방인들이 볼 때 이상히 보거나, 핍박할 수 있으므로 소리 내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 속 중심으로 묵상 기도를 하면 되는데, 이때 무릎을 꿇고 해도 되고, 서서해도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설령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해도 이는 죽은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고, 또 이러한 행위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법도에 맞게 예를 갖추어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가족들에 대한 배려와 예의이기도 하구요.
이때 기도할 내용은, 먼저 원수마귀 물리치는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원수마귀 다 물리쳐 주시옵소서.', 다음은 가정복음화와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영혼들이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하시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중심을 다해 아버지께 기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3. 추도예배
최근 어느 교회 목사님의 설교 중 '추도 예배도 우상 숭배'임을 지적. 일부 목회자들도 추도예배를 '죽은 사람과 그의 혼령을 대상으로 기리고 애도하는 예배'라 규정하고 명백한 우상숭배의 행위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제사는 그 형식과 절차에 있어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나 조상을 섬긴다는 명목아래 절을 합니다. 이는 그 마음을 내어주고 빼앗기는 것이므로 귀신이나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추도예배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므로, 불가하다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조문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추도예배 또한, 고인의 가족들의 위로와 위안을 삼고자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에 불가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추도예배의 목적이 남은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하도록 은혜를 나누기 위한 것이며, 혹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해도 그들 역시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만약 믿지 않는 가정이나, 믿지 않고 죽은 고인을 위해 추도예배를 드릴 때는 그 예배의 의미를 알려주고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죽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고 죽은 사람이든 '죽은 사람 앞에 상을 차리는 것'은 귀신 앞에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예배는 이와 다르다는 것을 미리 설명해 주어야 하지요.
이처럼 진정한 의미를 알고 예배를 드리므로, 믿지 않는 자들이 그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가족들이 함께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죽은 사람이든,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든 그 가정에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하여도 이를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오히려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하늘의 소망이 있으므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4. 예배 시 함께 상을 차리는 것에 대해.
상을 차려놓고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 상에 성경을 올려놓으며, 예배의 격식에 맞추어 드려야 합니다. 예배 후에 상을 차려 식사를 하도록 하면 되지요. 즉, 예배는 따로 드리고 다 마치고 난 후 상을 차리되 제사의 형식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정겹게 식사하며 서로 신앙의 격려를 하며 우애를 다지는 자리로 마련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마음이 중요한데, 그렇다고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은 상관없이 행위적인 것만 가지고 옳다 그르다, 그것도 자기 기준에 말해서는 안됩니다. 영의세계란 내가 아는 한계를 넘어 얼마든지 무한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교회에 다닌 지 수년이 되었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천국에서의 삶을 소망하며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면 너무 부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당신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확신하느냐"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보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물쭈물하고 맙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천국의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원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며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축복하셨습니다(창 1:26-28).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도 영을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시고 영으로 서로 교통하며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범하므로 영이 죽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롬 6:23) 죄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물, 슬픔, 고통, 질병, 가난, 죽음이 있는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은 후에는 지옥에서 영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 지극히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의 삯으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만세 전에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구원의 문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길을 따라 구원의 문을 들어가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모든 죄를 사함받고 잃었던 모든 축복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영이신 하나님과 다시 교통을 이룰 수 있게 되며 이 땅에서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문을 통하여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아닌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을지 없을지 이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령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가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받을 줄로 믿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확신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6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했고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테두리를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로마서 10:9-10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예수가 구세주가 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마음에 믿어 입으로 시인해야 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요 1:12)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19:2을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시는데(행 2:38) 마음에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인치시고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 1:22).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신하며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로마서 8:16에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요 3:5).
2.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기쁨이 넘쳐나고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과 함께 마음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까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아왔던 육신의 법과 새롭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고자하는 성령의 법이 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의 심정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표현했습니다(롬 7:24).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기도에 힘쓰게 되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시므로(롬 8:26)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어야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이요, 주님의 보혈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므로(요일 1:6-7) 성결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7:21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야고보서 2:17-22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해 나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고 있다면 행함있는 믿음을 소유한 것이니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전히 행하지 못하고 있다해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에 힘써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구원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 지극히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의 삯으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만세 전에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구원의 문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길을 따라 구원의 문을 들어가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모든 죄를 사함받고 잃었던 모든 축복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영이신 하나님과 다시 교통을 이룰 수 있게 되며 이 땅에서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문을 통하여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아닌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을지 없을지 이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령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가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받을 줄로 믿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확신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6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했고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테두리를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로마서 10:9-10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예수가 구세주가 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마음에 믿어 입으로 시인해야 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요 1:12)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19:2을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시는데(행 2:38) 마음에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인치시고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 1:22).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신하며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로마서 8:16에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요 3:5).
2.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기쁨이 넘쳐나고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과 함께 마음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까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아왔던 육신의 법과 새롭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고자하는 성령의 법이 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의 심정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표현했습니다(롬 7:24).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기도에 힘쓰게 되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시므로(롬 8:26)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어야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이요, 주님의 보혈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므로(요일 1:6-7) 성결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7:21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야고보서 2:17-22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해 나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빛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고 있다면 행함있는 믿음을 소유한 것이니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전히 행하지 못하고 있다해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에 힘써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구원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교회에 다닐려고 애쓰고 있기에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배(禮拜)의 사전적 의미는 '신(神)에게 경의(敬意)를 나타내며 경배(敬拜)하는 의식'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경배를 받을 만한 참된 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주신 분이며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완전하실 뿐아니라 전지전능하셔서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시고 성경의 저자가 되어서 우주만물과 세계역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로 타락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며 크신 사랑을 베푸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존경과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의식이어야 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예배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인 오늘이나 동일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적예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4:3-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드린 피의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사와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물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형태로 드려진 예배나 자기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이루어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 온 백성과 함께 여호와 앞에 나아가 일천번의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지식 뿐아니라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재물과 존영까지 주심으로 솔로몬 이전이나 이후에 그와 같음이 없게 하셨습니다(왕상 3:3-15, 대하 1:1-13)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므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예배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드리는 삶의 연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과 분리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세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을 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예배하는 것이요,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행함과 예물로써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의해야 할 몇가지 사항을 알려 드립니다.
1)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서 행할 때에 마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시간은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약속된 시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시간 안에 도착하여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드릴 준비를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대통령과 접견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미리 가서 준비하고 기다릴 것입니다. 하물며 일국의 대통령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에 늦는다거나 허겁지겁 달려와서야 되겠습니까.
2) 예배시간에는 말씀을 듣기에 전념해야 됩니다.
거룩한 단 위에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양떼들을 천성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따라서 설교 시간에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본다든가 옆사람과 소곤소곤 한다든가 가정 일터 사업터에 대한 염려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대통령이 연설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바르게 앉아서 경청하겠습니까. 예배시간에 졸거나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3) 술과 담배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초신자이기 때문에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술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 있다고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는 시간만큼은 술 담배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앞에 나갈 때도 술을 마시고 얼굴이 벌개서 나갈 수 없는데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오면서 술, 담배를 하고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4)예배 분위기를 흐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어린아이가 울거나 마구 떠들어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둔다면 다른 많은 성도들에게 방해가 됩니다. 마음을 모두어 예배를 드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격이 되니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드릴 때에 껌을 씹는다거나 예배 도중에 일어나 나간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서나 예배드리는 형제들 앞에서 무례한 행동이 됩니다.
사람 앞에서도 윗분이라면 대화중에 임의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는데 더더구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설령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예배에 참여했다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거나 티셔츠나 운동복 차림으로, 또는 슬리퍼를 신고 예배드리러 오는 경우 모두 하나님을 민망케 하며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는 될 수 있는 한 정장을 하기 바랍니다. 수요예배 같은 경우 일터에서 곧장 교회로 오는 경우도 있고, 모자를 쓸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판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겸비함 속에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할 뿐아니라 기쁨과 기도와 감사와 예물과 행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을 응답해 주시며 갖가지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담으로 천군천사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기 때문에 한 주간동안 형통한 축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예배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인 오늘이나 동일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적예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4:3-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드린 피의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사와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물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형태로 드려진 예배나 자기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이루어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 온 백성과 함께 여호와 앞에 나아가 일천번의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지식 뿐아니라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재물과 존영까지 주심으로 솔로몬 이전이나 이후에 그와 같음이 없게 하셨습니다(왕상 3:3-15, 대하 1:1-13)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므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예배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드리는 삶의 연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과 분리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세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을 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예배하는 것이요,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행함과 예물로써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의해야 할 몇가지 사항을 알려 드립니다.
1)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서 행할 때에 마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시간은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약속된 시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시간 안에 도착하여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드릴 준비를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대통령과 접견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미리 가서 준비하고 기다릴 것입니다. 하물며 일국의 대통령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에 늦는다거나 허겁지겁 달려와서야 되겠습니까.
2) 예배시간에는 말씀을 듣기에 전념해야 됩니다.
거룩한 단 위에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양떼들을 천성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따라서 설교 시간에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본다든가 옆사람과 소곤소곤 한다든가 가정 일터 사업터에 대한 염려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대통령이 연설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바르게 앉아서 경청하겠습니까. 예배시간에 졸거나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3) 술과 담배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초신자이기 때문에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술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 있다고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는 시간만큼은 술 담배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앞에 나갈 때도 술을 마시고 얼굴이 벌개서 나갈 수 없는데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오면서 술, 담배를 하고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4)예배 분위기를 흐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어린아이가 울거나 마구 떠들어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둔다면 다른 많은 성도들에게 방해가 됩니다. 마음을 모두어 예배를 드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격이 되니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드릴 때에 껌을 씹는다거나 예배 도중에 일어나 나간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서나 예배드리는 형제들 앞에서 무례한 행동이 됩니다.
사람 앞에서도 윗분이라면 대화중에 임의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는데 더더구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설령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예배에 참여했다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거나 티셔츠나 운동복 차림으로, 또는 슬리퍼를 신고 예배드리러 오는 경우 모두 하나님을 민망케 하며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는 될 수 있는 한 정장을 하기 바랍니다. 수요예배 같은 경우 일터에서 곧장 교회로 오는 경우도 있고, 모자를 쓸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판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겸비함 속에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할 뿐아니라 기쁨과 기도와 감사와 예물과 행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을 응답해 주시며 갖가지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담으로 천군천사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기 때문에 한 주간동안 형통한 축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기도하려고 하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과 같아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기도는 왜 해야 하는 것이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건으로서 신앙생활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며 친히 가르치신 기도내용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6:9-13). 또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을 보면 어떠한 자세로, 어떠한 중심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누가복음 22:39-44). 성경을 통해 기도는 왜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고백하고(마 6:9-10)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간구하며(마 6:11-13)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준다는 것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간구할 것은 일용할 양식 뿐만 아니라 죄사함을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으며 악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라도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써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으며 죄를 범하게 되고 시험에 들게 되며 결국 악에 빠지게 되므로 영생의 길을 온전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하므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만사형통의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복된 삶을 살고 영생복락도 소유하는 복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축복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통하여 기도의 본을 보이시고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무슨 일에나 자세를 바르게 할 때 마음도 모두어지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도할 때 먼저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올바른 기도생활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며 이러한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위대한 체험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습관을 좇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가정이나 학교, 사회 등 크고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법을 좇아 규칙적인 생활을 할 때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되고 이로써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가정에서 아침이나 저녁 식사시간을 정해 놓고 지키는 것은 매우 작고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질서를 가족 모두가 중요시하고 잘 지켜만 준다면 보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겠지요. 이와 같이 신앙 안에서도 영적인 충만함을 공급받는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습관을 좇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눅 22:39),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으며(사도행전 3:1), 다니엘 선지자도 하루 세번씩(단 6:10) 습관을 좇아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어른들 앞에서도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고 몸가짐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더더욱 자세를 바르게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의 향을 올리려면 마땅히 경건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기도에 전념하기도 쉽습니다. 다리가 연약하여 도저히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해 나가시면 하나님께서는 다리의 연약함도 강하게 해주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며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사자를 통하여 힘을 주시며 응답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야 하므로(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요,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약 4:2-3)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부르짖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기도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장소와 시간 그리고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른 모습과 자세를 갖출 때 마음도 모두어지는 것이며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향을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습관을 좇아 시간을 정해놓고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신속하게 응답으로 축복하십니다.

1.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고백하고(마 6:9-10)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간구하며(마 6:11-13)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준다는 것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간구할 것은 일용할 양식 뿐만 아니라 죄사함을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으며 악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라도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써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으며 죄를 범하게 되고 시험에 들게 되며 결국 악에 빠지게 되므로 영생의 길을 온전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하므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만사형통의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복된 삶을 살고 영생복락도 소유하는 복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축복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통하여 기도의 본을 보이시고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무슨 일에나 자세를 바르게 할 때 마음도 모두어지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도할 때 먼저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올바른 기도생활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며 이러한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위대한 체험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습관을 좇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가정이나 학교, 사회 등 크고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법을 좇아 규칙적인 생활을 할 때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되고 이로써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가정에서 아침이나 저녁 식사시간을 정해 놓고 지키는 것은 매우 작고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질서를 가족 모두가 중요시하고 잘 지켜만 준다면 보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겠지요. 이와 같이 신앙 안에서도 영적인 충만함을 공급받는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습관을 좇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눅 22:39),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으며(사도행전 3:1), 다니엘 선지자도 하루 세번씩(단 6:10) 습관을 좇아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어른들 앞에서도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고 몸가짐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더더욱 자세를 바르게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의 향을 올리려면 마땅히 경건한 자세를 취해야 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기도에 전념하기도 쉽습니다. 다리가 연약하여 도저히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해 나가시면 하나님께서는 다리의 연약함도 강하게 해주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며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사자를 통하여 힘을 주시며 응답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야 하므로(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요,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약 4:2-3)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부르짖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기도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장소와 시간 그리고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른 모습과 자세를 갖출 때 마음도 모두어지는 것이며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향을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습관을 좇아 시간을 정해놓고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신속하게 응답으로 축복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체험한 기록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이고, 권능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증은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에게 권능이 임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즉시 하인의 질병을 치료해 주셨으며,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권능받은 주의 종이나 일꾼들을 통해 수많은 기사와 표적, 희한한 능과 기이한 일들을 나타내시며 무수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일까요?
1. 권능이란 무엇인가?
권능은 '권세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믿음의 힘입니다. 또한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있고 영광스러운 힘이요,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성결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따라서 모든 악과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면 영적인 권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 권세, 권능은 어떻게 다를까요? 비유를 들면, 가정에서 돈을 잘 벌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한 아들이 있다 해도 가장으로서의 권세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질서가 잡힌 가정이라면 아들이 벌어온 돈을 아버지가 요구할 수 있고, 아들의 입장에서는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세가 있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있다면 권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권능은 어떠한 사람에게 임하는가?
성경을 상고해 보면 하나님께 권능을 받은 사람들은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 즉 성결된 사람이었으며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권능을 행하려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차원의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이 되면 불 같은 기도를 쌓는 만큼 권능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아직 성결에 이르지 못하여 스스로 권능을 행할 만한 차원에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보장하는 사람의 기도를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권능의 역사가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안수하여 보내었을 때 표적이 따랐던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마 10:1).
3.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
예수님께서는 죽어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셨으며, 베드로나 바울 사도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갖가지 역사를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놀라운 일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수 있으며 오늘날도 권능 받은 하나님의 종들과 일꾼들을 통하여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시 62:11), 마치 하나님께 속한 고유상표와 같아서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권능을 행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이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권능은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지만, 거짓으로 꾸며낸 권능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개인의 유익을 취하거나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하므로 열매를 보아 분별할 수 있습니다.
4. 권능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증들
1) 표적(表蹟)이 따릅니다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는 것은 물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짧았던 다리가 길어지며, 굽었던 허리가 펴지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역사 등이 이에 속하지요.
마태복음 4:23을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여 병과 약한 것이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가벼운 질병이 아니라 불의의 사고나 부모나 자신의 실수로 신체의 어떤 기관이 마비되거나 퇴화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 행함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 즉 신유의 은사를 받으면 성령의 불의 역사로 아픈 부위나 질병의 균을 태워 병을 낫게 할 수는 있으나, 그런 병들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므로 표적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 희한한 능(能)과 기이한 일이 따릅니다
희한한 능의 예로는 사도행전 19:11-12에 기록된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경우, 그림자만 스쳐도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5:15-16). 기이한 일에 대한 예로는 모세가 애굽에서 행했던 열 재앙과 예수님께서 중풍으로 꼼짝도 못하던 사람을 치료하신 것(눅 5:17-26)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것 이 외에도 희한하고 기이한 일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3) 기사(奇事)가 따릅니다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는 일들로 주로 기상 현상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름을 움직인다든가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 등이 이에 속하지요.
성경상에서 예를 들면, 사무엘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 주신 일이 있었고(삼상 12:18),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간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20:11). 또한 엘리야 선지자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셨다고 했습니다(약 5:17-18). 이처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의 간절한 믿음의 간구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성결을 이루며 불같이 기도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권능의 차원에 들어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일까요?
1. 권능이란 무엇인가?
권능은 '권세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믿음의 힘입니다. 또한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있고 영광스러운 힘이요,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성결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따라서 모든 악과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된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면 영적인 권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 권세, 권능은 어떻게 다를까요? 비유를 들면, 가정에서 돈을 잘 벌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한 아들이 있다 해도 가장으로서의 권세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질서가 잡힌 가정이라면 아들이 벌어온 돈을 아버지가 요구할 수 있고, 아들의 입장에서는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세가 있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있다면 권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권능은 어떠한 사람에게 임하는가?
성경을 상고해 보면 하나님께 권능을 받은 사람들은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 즉 성결된 사람이었으며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권능을 행하려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차원의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이 되면 불 같은 기도를 쌓는 만큼 권능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아직 성결에 이르지 못하여 스스로 권능을 행할 만한 차원에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보장하는 사람의 기도를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권능의 역사가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안수하여 보내었을 때 표적이 따랐던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마 10:1).
3.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
예수님께서는 죽어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셨으며, 베드로나 바울 사도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갖가지 역사를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놀라운 일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수 있으며 오늘날도 권능 받은 하나님의 종들과 일꾼들을 통하여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시 62:11), 마치 하나님께 속한 고유상표와 같아서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권능을 행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이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권능은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지만, 거짓으로 꾸며낸 권능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개인의 유익을 취하거나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하므로 열매를 보아 분별할 수 있습니다.
4. 권능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증들
1) 표적(表蹟)이 따릅니다
표적이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는 것은 물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짧았던 다리가 길어지며, 굽었던 허리가 펴지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역사 등이 이에 속하지요.
마태복음 4:23을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여 병과 약한 것이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가벼운 질병이 아니라 불의의 사고나 부모나 자신의 실수로 신체의 어떤 기관이 마비되거나 퇴화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 행함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 즉 신유의 은사를 받으면 성령의 불의 역사로 아픈 부위나 질병의 균을 태워 병을 낫게 할 수는 있으나, 그런 병들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므로 표적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 희한한 능(能)과 기이한 일이 따릅니다
희한한 능의 예로는 사도행전 19:11-12에 기록된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경우, 그림자만 스쳐도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5:15-16). 기이한 일에 대한 예로는 모세가 애굽에서 행했던 열 재앙과 예수님께서 중풍으로 꼼짝도 못하던 사람을 치료하신 것(눅 5:17-26)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것 이 외에도 희한하고 기이한 일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3) 기사(奇事)가 따릅니다
기사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천기를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는 일들로 주로 기상 현상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름을 움직인다든가 비를 오게 하거나 멎게 하는 것, 천체를 움직이는 것 등이 이에 속하지요.
성경상에서 예를 들면, 사무엘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 주신 일이 있었고(삼상 12:18),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간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20:11). 또한 엘리야 선지자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셨다고 했습니다(약 5:17-18). 이처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의 간절한 믿음의 간구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성결을 이루며 불같이 기도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권능의 차원에 들어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주변의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열심히 교회생활은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하나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과 부딪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면 화평을 이룰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가정과 사업터, 일터, 교회 등 모든 환경과 관계 속에서 화평함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을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권면하시며 히브리서 12:14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화평을 이룬다고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서로 화평하지 못하며 어떻게 해야 화평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언 16:7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얼마나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심비에 새길 뿐 아니라 깨우친 말씀의 작은 것 하나까지라도 지켜 행하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좇아 믿음으로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수라도 화목케 하십니다.
2) 자기의 위치를 바르게 파악하고 상하좌우로 마음의 씀씀이가 온전한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서 질서를 좇지 않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료들이나 아랫사람이라 하여 쉽게 대하고 반말을 하는 경우는 없는가, 자주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어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거나 상대를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며 지적하는 일이 없는가 살펴야 합니다. 또한 상대를 무시하여 상대의 주장을 묵살하고 자기 의견을 강요하거나 상대를 우습게 여기고 범사에 가르치려 한다든지,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일을 진행시키는 경우는 없는가 돌아 보아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행치 않으므로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고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에서 질서를 좇아 행하되 넓은 마음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3) 말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18을 보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를 만났을 때 인사하지 않거나 미소짓지 않는 것, 또한 성격이 급한 나머지 상대의 말을 가로막고 먼저 자기의 일을 챙기는 것 등 작은 부주의가 상대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와 자녀간이라 해도 예의 없이 행하고 때를 따라 사랑과 존경의 표현을 하지 않는 것도 서로간에 보이지 않는 틈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로, 겸손히 상대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 진정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피조물들에 의해 죽기까지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셨고, 10절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어 상대의 어떤 말이나 행동을 쉽게 판단하지 말고 포용하는 자세로 대해야 하며 선 속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 배움과 의식의 차이가 있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 편에서 보면 부모가 옳고 자녀 편에서 보면 자녀가 옳지만 진리 안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고 어떤 경우라도 다투지 말고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며 이해와 사랑으로 품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상대의 실수나 허물, 부족함을 생각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는 자세를 가져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하여 구체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상대의 행위가 눈에 거슬린다고 당장 사람들 앞에서 면박이나 지적을 하는 경우, 자기의 잘못을 수습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회피하는 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상대의 허물을 교묘히 드러내는 행위,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태도 등은 결코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해를 볼지라도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양보하며 섬겨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라야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여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을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권면하시며 히브리서 12:14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화평을 이룬다고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서로 화평하지 못하며 어떻게 해야 화평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언 16:7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얼마나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심비에 새길 뿐 아니라 깨우친 말씀의 작은 것 하나까지라도 지켜 행하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좇아 믿음으로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수라도 화목케 하십니다.
2) 자기의 위치를 바르게 파악하고 상하좌우로 마음의 씀씀이가 온전한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서 질서를 좇지 않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료들이나 아랫사람이라 하여 쉽게 대하고 반말을 하는 경우는 없는가, 자주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어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거나 상대를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며 지적하는 일이 없는가 살펴야 합니다. 또한 상대를 무시하여 상대의 주장을 묵살하고 자기 의견을 강요하거나 상대를 우습게 여기고 범사에 가르치려 한다든지,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일을 진행시키는 경우는 없는가 돌아 보아야 합니다.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행치 않으므로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고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에서 질서를 좇아 행하되 넓은 마음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3) 말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18을 보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를 만났을 때 인사하지 않거나 미소짓지 않는 것, 또한 성격이 급한 나머지 상대의 말을 가로막고 먼저 자기의 일을 챙기는 것 등 작은 부주의가 상대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와 자녀간이라 해도 예의 없이 행하고 때를 따라 사랑과 존경의 표현을 하지 않는 것도 서로간에 보이지 않는 틈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로, 겸손히 상대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 진정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피조물들에 의해 죽기까지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셨고, 10절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어 상대의 어떤 말이나 행동을 쉽게 판단하지 말고 포용하는 자세로 대해야 하며 선 속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 배움과 의식의 차이가 있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 편에서 보면 부모가 옳고 자녀 편에서 보면 자녀가 옳지만 진리 안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고 어떤 경우라도 다투지 말고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며 이해와 사랑으로 품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상대의 실수나 허물, 부족함을 생각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는 자세를 가져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하여 구체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상대의 행위가 눈에 거슬린다고 당장 사람들 앞에서 면박이나 지적을 하는 경우, 자기의 잘못을 수습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회피하는 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상대의 허물을 교묘히 드러내는 행위,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태도 등은 결코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해를 볼지라도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양보하며 섬겨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라야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여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요한복음 10:34-35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셨거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신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며 그 하신 말씀을 반드시 시행하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다 이루어질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말씀하신 의미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신처럼 보여지거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신의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으로 인정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직접 지상에 강림하셨다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창 11:5, 출 19:18-20, 20:24, 34:5)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고, 또한 주의 사자(使者)를 통해 말씀하기도 하셨으며 이상(異象)과 몽조(夢兆)로 알려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결과를 미리 예언할 수 있었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풀 수 없는 꿈이나 이상에 대해서도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처럼 보여지거나 신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예
1) 하나님의 신(神)이 감동한 사람 요셉
요셉이 죄인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을 때 당시 애굽의 왕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번민하던 중 요셉을 추천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로 왕 앞에 서게 된 요셉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니 꿈에 대한 명쾌한 해석은 물론, 해결 방안까지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감동을 받은 바로 왕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神)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39)라고 했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로 왕이 보기에도 요셉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요 명철과 지혜가 특출한 사람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왕은 요셉에게 왕 다음 가는 권세를 주고 애굽을 다스리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바로 왕에게 신(神)으로 보였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로 택함을 받았던 모세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다'는 약속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출 7:1). 과연 모세는 바로 왕에게 신처럼 보였기 때문에 모세가 애굽에 재앙들을 내리는데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왕이 모세를 신(神)처럼 보았다는 것은 모세가 행한 기사와 표적들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역사들로 보았다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신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 앞에서 모세를 어떻게 신이 되게 하셨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바로 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계속 거절하는 바로 왕 앞에 모세가 열 차례에 걸쳐 재앙을 선포하도록 하셨고 과연 모세의 말대로 이루어졌지요. 그러니 바로 왕이 볼 때에 모세는 마치 신처럼 보여졌던 것입니다.
3) 많은 사람들에게 신(神)으로 보여진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하던 중 나면서 앉은뱅이 된 한 사람이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앉은뱅이를 뛰고 걷게 했습니다(행 14:9-10). 이 때 바울이 행한 일을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14:11) 했지요.
또 한 번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 배가 파선하여 '멜리데'라는 섬에 올랐을 때의 일입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무더기를 불에 넣자 뜨거움을 인해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이를 본 토인들은 바울을 '살인한 자'라 판단했으나 바울의 손이 붓든지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알았는데 조금도 상함이 없자 오히려 '신'이라 말하며(행 28:6) 후히 대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니 신이라 칭함받기도 했고 신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비밀한 일들을 말했을 때는 왕이라도 엎드려 절할 정도로 존귀히 여김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역사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교회의 경우, 하나님께서 1982년 교회 개척 이래 상상할 수 없는 권능으로 역사하시며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모세 선지자를 통해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하심같이 전남 무안 바닷가의 짠물이 단물이 되는 창조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으며, 단물을 통하여 나타나는 권능의 역사들로 인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함께하심을 만방에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심지어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나게 하시는 등 각종 표적들을 무수히 베풀어 주셨지요.
이 외에도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 손수건을 통한 희한한 능(행 19:11-12)은 물론, 무지개와 별의 이동,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역사(요 4:53), 구름의 나타남과 사라짐 같은 기이한 일들이 수없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국사(國事)와 세계사(世界事)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 성취 등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편 82:6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만한 자격과 그릇을 갖추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더욱 창대히 이룰 뿐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다 이루어질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말씀하신 의미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신처럼 보여지거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신의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으로 인정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직접 지상에 강림하셨다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창 11:5, 출 19:18-20, 20:24, 34:5)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고, 또한 주의 사자(使者)를 통해 말씀하기도 하셨으며 이상(異象)과 몽조(夢兆)로 알려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결과를 미리 예언할 수 있었고, 사람의 생각으로는 풀 수 없는 꿈이나 이상에 대해서도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처럼 보여지거나 신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예
1) 하나님의 신(神)이 감동한 사람 요셉
요셉이 죄인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을 때 당시 애굽의 왕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번민하던 중 요셉을 추천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로 왕 앞에 서게 된 요셉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니 꿈에 대한 명쾌한 해석은 물론, 해결 방안까지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감동을 받은 바로 왕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神)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39)라고 했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로 왕이 보기에도 요셉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요 명철과 지혜가 특출한 사람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왕은 요셉에게 왕 다음 가는 권세를 주고 애굽을 다스리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바로 왕에게 신(神)으로 보였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로 택함을 받았던 모세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神)이 되게 하였다'는 약속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출 7:1). 과연 모세는 바로 왕에게 신처럼 보였기 때문에 모세가 애굽에 재앙들을 내리는데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왕이 모세를 신(神)처럼 보았다는 것은 모세가 행한 기사와 표적들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역사들로 보았다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신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 앞에서 모세를 어떻게 신이 되게 하셨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바로 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계속 거절하는 바로 왕 앞에 모세가 열 차례에 걸쳐 재앙을 선포하도록 하셨고 과연 모세의 말대로 이루어졌지요. 그러니 바로 왕이 볼 때에 모세는 마치 신처럼 보여졌던 것입니다.
3) 많은 사람들에게 신(神)으로 보여진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하던 중 나면서 앉은뱅이 된 한 사람이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앉은뱅이를 뛰고 걷게 했습니다(행 14:9-10). 이 때 바울이 행한 일을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14:11) 했지요.
또 한 번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 배가 파선하여 '멜리데'라는 섬에 올랐을 때의 일입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무더기를 불에 넣자 뜨거움을 인해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이를 본 토인들은 바울을 '살인한 자'라 판단했으나 바울의 손이 붓든지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알았는데 조금도 상함이 없자 오히려 '신'이라 말하며(행 28:6) 후히 대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니 신이라 칭함받기도 했고 신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비밀한 일들을 말했을 때는 왕이라도 엎드려 절할 정도로 존귀히 여김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역사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교회의 경우, 하나님께서 1982년 교회 개척 이래 상상할 수 없는 권능으로 역사하시며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모세 선지자를 통해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하심같이 전남 무안 바닷가의 짠물이 단물이 되는 창조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으며, 단물을 통하여 나타나는 권능의 역사들로 인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함께하심을 만방에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심지어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나게 하시는 등 각종 표적들을 무수히 베풀어 주셨지요.
이 외에도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 손수건을 통한 희한한 능(행 19:11-12)은 물론, 무지개와 별의 이동,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역사(요 4:53), 구름의 나타남과 사라짐 같은 기이한 일들이 수없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국사(國事)와 세계사(世界事)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 성취 등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편 82:6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만한 자격과 그릇을 갖추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더욱 창대히 이룰 뿐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해를 맞아 교회에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 많은 열매를 맺고 주님께 칭찬받는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는 주어진 사명에 관한 내용으로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실제로 일어날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주인으로 나오는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타국'이란 이 세상에 있는 나라가 아닌 하늘나라 천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명을 감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이것을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간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자기 소유'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천하만물과 인생들을 말합니다(요 1:3, 히 1:2).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원수 마귀의 종이 되어 그 아래 속하게 되었으므로(눅 4:6)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나누어 주고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갑절로 남긴 종은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달란트로 장사하지 않고 그냥 감추어 두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달란트'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나 사명을 말합니다. 비록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성가대원, 봉사대원 등 교회에서 주어지는 직분과 사명은 다르더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지 달란트 비유를 통해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주어진 사명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합한 중심인가를 살펴보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과 같이 끈기 있고 집념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뿌리가 되게 하셨고,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으며, 다니엘과 같이 변치 않고 타협하지 않는 중심을 통해 이방 세계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명백히 증거하게 하셨고, 사도 바울과 같이 불 같은 사명감과 열심을 가진 사람을 세계 복음화에 앞장 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먼저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신의 사명을 귀히 여김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더라도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불타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어야 맡겨진 분야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영적인 재능을 힘써 개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재능은 육적인 재능과 영적인 재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육적인 재능이란 재주나 능력, 기술이나 지혜, 학식 같은 것들을 말하며, 영적인 재능은 믿음, 소망,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는 육적인 재능보다 영적인 재능이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보면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세주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하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였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재능만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영적인 재능을 겸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과 소망, 사랑을 영적인 재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고 충성할 수 있으며 믿음이 클수록 확신 가운데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어야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므로 너무나 힘이 들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늘 나라 소망이 넘쳐나야 어떠한 환경 조건에도 감사하고 하늘 상급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를 맞아도 감사하고 핍박을 받아도 참으며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 말씀대로 행하게 됩니다. 이런 소망이 있어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 영원한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영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버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요 14:21),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는 희생적인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3. 하늘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 갑절 이상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살펴본 것처럼 땅은 곧 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주어진 사명을 마음에 품기만 했을 뿐 행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이므로(약 2:22)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도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땀흘리며 수고하지 않고서야 어찌 발전이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하늘의 지혜를 받지 아니하고 어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잠언 3장 14절에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했고,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속하셨으니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 하늘의 지혜를 받아 갑절 이상의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기 소유'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천하만물과 인생들을 말합니다(요 1:3, 히 1:2).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원수 마귀의 종이 되어 그 아래 속하게 되었으므로(눅 4:6)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나누어 주고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갑절로 남긴 종은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달란트로 장사하지 않고 그냥 감추어 두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달란트'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나 사명을 말합니다. 비록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성가대원, 봉사대원 등 교회에서 주어지는 직분과 사명은 다르더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지 달란트 비유를 통해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주어진 사명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합한 중심인가를 살펴보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과 같이 끈기 있고 집념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뿌리가 되게 하셨고,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으며, 다니엘과 같이 변치 않고 타협하지 않는 중심을 통해 이방 세계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명백히 증거하게 하셨고, 사도 바울과 같이 불 같은 사명감과 열심을 가진 사람을 세계 복음화에 앞장 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먼저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신의 사명을 귀히 여김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더라도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불타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어야 맡겨진 분야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영적인 재능을 힘써 개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재능은 육적인 재능과 영적인 재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육적인 재능이란 재주나 능력, 기술이나 지혜, 학식 같은 것들을 말하며, 영적인 재능은 믿음, 소망,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는 육적인 재능보다 영적인 재능이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보면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세주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하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였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재능만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영적인 재능을 겸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과 소망, 사랑을 영적인 재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고 충성할 수 있으며 믿음이 클수록 확신 가운데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어야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므로 너무나 힘이 들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늘 나라 소망이 넘쳐나야 어떠한 환경 조건에도 감사하고 하늘 상급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를 맞아도 감사하고 핍박을 받아도 참으며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 말씀대로 행하게 됩니다. 이런 소망이 있어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 영원한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영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버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요 14:21),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기는 희생적인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3. 하늘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 갑절 이상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살펴본 것처럼 땅은 곧 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주어진 사명을 마음에 품기만 했을 뿐 행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이므로(약 2:22)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도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땀흘리며 수고하지 않고서야 어찌 발전이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하늘의 지혜를 받지 아니하고 어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잠언 3장 14절에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했고,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속하셨으니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 하늘의 지혜를 받아 갑절 이상의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얼마 전 뜻밖의 재난을 당하여 생활이 궁핍해졌을 때 교회에서 구제를 받아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용기를 얻어 자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보면 작은 정성이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는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며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으며(마 19:19), 특히 '고아나 과부를 돌아보라'(출 2:22 ; 신 14:29 ; 약 1:27)고 곳곳에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모로 섬기고 있는 영적인 형제 자매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믿음 안에 있는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일지라도 행함과 진실함으로 돌아보면서 선한 행실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영혼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녀들을 기뻐하시며 넘치는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시며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구제는 무엇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행해야 할까요?
1. 하나님께서 명하신 구제
사전을 보면 구제(救濟)란 '불행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그의 백성들에게 구제할 것을 명하셨는데 신명기 15:10-11에는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2:15-17에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삶을 사는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잠시 청지기로써 맡겨주신 것임을 깨달아 내 이웃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을 통해 세워진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행함으로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는데 특이한 것 중에 하나는 구제가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행 2:42-47).
2. 구제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
잠언 11:25을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를 행하면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36 이하를 보면 욥바에 살고 있던 '도르가'라는 여인은 평소에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는데 그녀가 병들어 죽었을 때 베드로 사도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고넬료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기억하사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를 보내어 온 가족에게 성령 세례를 베풀어주시며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끊임없이 구제와 선행을 베풀며 남을 윤택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하시며 영생의 축복과 함께 이 땅에서도 놀라운 축복을 받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더욱 구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 방법
요한일서 3:17-18을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궁핍함을 보았다면 도와주되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6:3-4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교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므로 은밀하게 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 중심에서 겸손한 자세로 행해야 할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구제란 내가 물질에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아껴서라도 작은 정성을 모아 하나님의 전에 구제금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한 과부가 헌금한 생활비 전체인 두렙 돈을 칭찬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 대상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말씀하셨으니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경우는 구제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 오히려 자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진정한 도움은 자립해야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서 시험 환난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깨닫고 돌이켜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만일 이러한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게 되면 죄를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도와준 사람도 함께 환난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구제를 할 때는 생활 능력이 없으나 믿음을 갖고 생활하려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이나, 일을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 능력이 없는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의 경우입니다.
그리고 구제를 하고자 할 때는 교회 앞에 구제 헌금을 드림으로 교회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를 통해 복음도 함께 전파되므로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를 할 때에 복음을 모르던 사람일지라도 자연스럽게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참된 생명을 얻게 되니 참으로 가치 있는 영적인 구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구제를 행하여 널리 복음을 전하며 이웃과 참된 사랑을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모로 섬기고 있는 영적인 형제 자매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믿음 안에 있는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일지라도 행함과 진실함으로 돌아보면서 선한 행실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영혼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녀들을 기뻐하시며 넘치는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시며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구제는 무엇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행해야 할까요?
1. 하나님께서 명하신 구제
사전을 보면 구제(救濟)란 '불행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그의 백성들에게 구제할 것을 명하셨는데 신명기 15:10-11에는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2:15-17에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삶을 사는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잠시 청지기로써 맡겨주신 것임을 깨달아 내 이웃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을 통해 세워진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행함으로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는데 특이한 것 중에 하나는 구제가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행 2:42-47).
2. 구제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
잠언 11:25을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를 행하면 놀라운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36 이하를 보면 욥바에 살고 있던 '도르가'라는 여인은 평소에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는데 그녀가 병들어 죽었을 때 베드로 사도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고넬료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기억하사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를 보내어 온 가족에게 성령 세례를 베풀어주시며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끊임없이 구제와 선행을 베풀며 남을 윤택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하시며 영생의 축복과 함께 이 땅에서도 놀라운 축복을 받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더욱 구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 방법
요한일서 3:17-18을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궁핍함을 보았다면 도와주되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6:3-4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교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므로 은밀하게 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 중심에서 겸손한 자세로 행해야 할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구제란 내가 물질에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아껴서라도 작은 정성을 모아 하나님의 전에 구제금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한 과부가 헌금한 생활비 전체인 두렙 돈을 칭찬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 대상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말씀하셨으니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경우는 구제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 오히려 자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진정한 도움은 자립해야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서 시험 환난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깨닫고 돌이켜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만일 이러한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게 되면 죄를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도와준 사람도 함께 환난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구제를 할 때는 생활 능력이 없으나 믿음을 갖고 생활하려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이나, 일을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 능력이 없는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의 경우입니다.
그리고 구제를 하고자 할 때는 교회 앞에 구제 헌금을 드림으로 교회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를 통해 복음도 함께 전파되므로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를 할 때에 복음을 모르던 사람일지라도 자연스럽게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참된 생명을 얻게 되니 참으로 가치 있는 영적인 구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구제를 행하여 널리 복음을 전하며 이웃과 참된 사랑을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마음껏 구제하며 선교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이며 축복의 비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온전한 십일조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은 천지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규례로 정하시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말 3:10-12).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니 저주를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말 3:7-9).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와 헌물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혹여 잘못 이해하여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수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하나님께 드리고 그 나머지를 우리들에게 쓰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헌물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예물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리는 각종 감사예물, 직분 주심에 감사하는 위임예물, 죄를 회개하며 드리는 속죄제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화목제물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 8-10절을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수많은 환란과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고 도적질하였기 때문임을 알려주시며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으로 축복된 삶을 살도록 간곡히 권면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저주에는 영적인 저주와 육적인 저주가 있는데, 영적인 저주란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된 것을 말합니다(창 2: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믿고 영적인 주권을 인정하여 주일을 지키며 말씀대로 지켜 살아가게 되면 영적인 저주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반면에 육적인 저주란 아담의 불순종으로 천하만물이 모두 저주를 받아 사람이 종신토록 땀흘려야 그 소산을 먹게 된 것입니다(창 3: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되면 이러한 육적인 저주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어 축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규례로 삼으시고 지켜 행하도록 성경 곳곳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섭리를 분명히 깨달아 명하신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함으로 축복된 삶을 영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방법
온전한 십일조란 사업터, 일터와 각종 분야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규례입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1년 농사를 지어 10가마니의 소출을 거두었다고 하면 그 중에 1 가마니를 하나님께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고정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리기가 아주 쉽습니다. 수입이 백만 원이라면 십분의 일인 십만 원을 십일조로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적금이나 세금 등을 제하고 실수령액이 70만원이니 7만원만 드리겠다고 한다면 이는 온전한 십일조가 되지 못합니다. 수입이 있으니 적금도 세금도 낼 수 있는 것임을 알아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선물을 받았거나 보너스, 기타 부수입이 있다면 이것도 계산하여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학생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임의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나, 선물, 세뱃돈 등이 수입이 되므로 그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므로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심으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영혼이 잘 되고, 충성 봉사로 심으면 영육간에 강건함을 입으며 십일조와 감사예물, 건축예물, 구제헌금 등 물질로 심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많은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도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기뻐받으시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소속된 교회에 드려야 하며 자기 임의대로 감사예물이나 건축예물 등으로 대신하여 드리면 안 됩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엄연히 구분되어지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것이므로 성도가 임의로 사용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의 재정기관을 통하여 쓰여지게 됩니다. 즉, 주의 종이나 일꾼들의 분깃으로, 각종 선교나 구제로, 성전건축 등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며 영혼을 구원하는데 쓰여집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한 번 마음에 정한 바는 변개함이 없는 온전한 중심으로 드리되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드릴 때 이 땅에서도 풍성히 거두게 되며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으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3장 10-12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믿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면 모든 시험과 환란, 질병과 사고로부터 지킴 받을 뿐만 아니라 가정과 일터, 사업터 위에 놀라운 물질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와 헌물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혹여 잘못 이해하여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수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으로 알아 하나님께 드리고 그 나머지를 우리들에게 쓰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헌물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예물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리는 각종 감사예물, 직분 주심에 감사하는 위임예물, 죄를 회개하며 드리는 속죄제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화목제물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 8-10절을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수많은 환란과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고 도적질하였기 때문임을 알려주시며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으로 축복된 삶을 살도록 간곡히 권면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저주에는 영적인 저주와 육적인 저주가 있는데, 영적인 저주란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된 것을 말합니다(창 2: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믿고 영적인 주권을 인정하여 주일을 지키며 말씀대로 지켜 살아가게 되면 영적인 저주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반면에 육적인 저주란 아담의 불순종으로 천하만물이 모두 저주를 받아 사람이 종신토록 땀흘려야 그 소산을 먹게 된 것입니다(창 3: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되면 이러한 육적인 저주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어 축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규례로 삼으시고 지켜 행하도록 성경 곳곳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섭리를 분명히 깨달아 명하신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함으로 축복된 삶을 영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방법
온전한 십일조란 사업터, 일터와 각종 분야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규례입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1년 농사를 지어 10가마니의 소출을 거두었다고 하면 그 중에 1 가마니를 하나님께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고정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리기가 아주 쉽습니다. 수입이 백만 원이라면 십분의 일인 십만 원을 십일조로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적금이나 세금 등을 제하고 실수령액이 70만원이니 7만원만 드리겠다고 한다면 이는 온전한 십일조가 되지 못합니다. 수입이 있으니 적금도 세금도 낼 수 있는 것임을 알아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선물을 받았거나 보너스, 기타 부수입이 있다면 이것도 계산하여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학생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임의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나, 선물, 세뱃돈 등이 수입이 되므로 그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므로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심으면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영혼이 잘 되고, 충성 봉사로 심으면 영육간에 강건함을 입으며 십일조와 감사예물, 건축예물, 구제헌금 등 물질로 심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많은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도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기뻐받으시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소속된 교회에 드려야 하며 자기 임의대로 감사예물이나 건축예물 등으로 대신하여 드리면 안 됩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엄연히 구분되어지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것이므로 성도가 임의로 사용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의 재정기관을 통하여 쓰여지게 됩니다. 즉, 주의 종이나 일꾼들의 분깃으로, 각종 선교나 구제로, 성전건축 등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며 영혼을 구원하는데 쓰여집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한 번 마음에 정한 바는 변개함이 없는 온전한 중심으로 드리되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드릴 때 이 땅에서도 풍성히 거두게 되며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으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3장 10-12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믿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면 모든 시험과 환란, 질병과 사고로부터 지킴 받을 뿐만 아니라 가정과 일터, 사업터 위에 놀라운 물질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성탄절과 같은 절기가 되면 교회에서는 세례식을 거행하는데 세례는 왜 받는 것이며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중대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보면 그 내용이 나오는데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되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는 예전이 바로 세례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주님께서 친히 명하신 거룩한 예식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할례로 나타내었습니다. 남자의 성기에 할례함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언약의 표를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육체에 행해지는 표면적인 할례보다는 마음에 행해지는 내면적인 할례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와서는 할례를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내면적인 할례를 받게 하시고 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공적으로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구약시대의 할례가 발전된 의식으로서 내적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외적으로 증거하는 상징적인 표가 됩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물로 세례를 받으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행위적으로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내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가 없으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지요.
둘째로, 성령받은 자체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함입니다.
세례는 성령받은 자체 즉 이제 성령받아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고 기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성령을 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기념하는 예적인 표가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날마다 씻김을 받기 위함입니다.
물로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더러운 죄의 모습들을 깨끗이 씻어 버려서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세례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외적인 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데 이러한 증거로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2.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
베드로전서 3장 21절을 보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생명을 주고 죄를 씻어 주는 구원의 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은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물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러움으로 가득 찰 것이요, 모든 생물들은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주어 깨끗케 하는 작용이 있을 뿐 아니라 생명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영생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5절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마음에 양식을 삼고 지켜 행해야 마음 안에 있는 더러운 죄가 버려지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요, 또한 성령을 받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베풀 때에는 물로 베푸는 것이요,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외적으로 증거하는 상징적인 표가 되는 것입니다.
3. 세례를 받는 시기
물세례에 있어 성령이 오시기 이전의 물세례와 오늘날의 물세례는 다릅니다.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은 상황에서 주었던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10일 있다가 성령이 오셨을 때에 그 이전에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장 16-17절을 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도 성령을 알지 못하고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어 사도들이 가서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을 받지 않고도 물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오늘날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받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다음에 물세례를 받는 것이 옳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물세례를 먼저 받고 그 다음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7, 48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했습니다. 즉 성령받은 사람은 누구나 물로 세례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에 등록을 하고 6개월간 학습을 받은 후, 또다시 6개월이 지난 다음에 세례를 받도록 각 교단의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정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인도한 후, 세례를 받게 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을 변치 아니하고 충성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마음에 성령받은 확신과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요,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된 확신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되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는 예전이 바로 세례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주님께서 친히 명하신 거룩한 예식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할례로 나타내었습니다. 남자의 성기에 할례함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언약의 표를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육체에 행해지는 표면적인 할례보다는 마음에 행해지는 내면적인 할례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와서는 할례를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내면적인 할례를 받게 하시고 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공적으로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구약시대의 할례가 발전된 의식으로서 내적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외적으로 증거하는 상징적인 표가 됩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물로 세례를 받으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행위적으로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내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가 없으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지요.
둘째로, 성령받은 자체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함입니다.
세례는 성령받은 자체 즉 이제 성령받아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고 기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성령을 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기념하는 예적인 표가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날마다 씻김을 받기 위함입니다.
물로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더러운 죄의 모습들을 깨끗이 씻어 버려서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세례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외적인 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데 이러한 증거로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2.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이유
베드로전서 3장 21절을 보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생명을 주고 죄를 씻어 주는 구원의 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은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물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러움으로 가득 찰 것이요, 모든 생물들은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주어 깨끗케 하는 작용이 있을 뿐 아니라 생명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영생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5절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마음에 양식을 삼고 지켜 행해야 마음 안에 있는 더러운 죄가 버려지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요, 또한 성령을 받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베풀 때에는 물로 베푸는 것이요,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외적으로 증거하는 상징적인 표가 되는 것입니다.
3. 세례를 받는 시기
물세례에 있어 성령이 오시기 이전의 물세례와 오늘날의 물세례는 다릅니다.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은 상황에서 주었던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10일 있다가 성령이 오셨을 때에 그 이전에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장 16-17절을 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도 성령을 알지 못하고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어 사도들이 가서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을 받지 않고도 물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오늘날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받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다음에 물세례를 받는 것이 옳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물세례를 먼저 받고 그 다음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7, 48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했습니다. 즉 성령받은 사람은 누구나 물로 세례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에 등록을 하고 6개월간 학습을 받은 후, 또다시 6개월이 지난 다음에 세례를 받도록 각 교단의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정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인도한 후, 세례를 받게 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을 변치 아니하고 충성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마음에 성령받은 확신과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요,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된 확신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기록된 출애굽기 20장 8-11절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싶어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친구가 있는데 얼마나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지 주일 아침이면 교회에 가서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주일 대예배 뿐 아니라 저녁예배도 드리고 기도모임, 친교모임도 가지며 봉사도 하는데 너무나 좋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는 일주일 중에서 가장 편안히 육체를 쉴 수 있는 휴일에 왜 하루 종일 교회에 가 있느냐고 말렸는데 지금은 함께 교회에 다니고 있 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닌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대로 살고 싶습니다. 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데 왜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지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그 의미와 방법은 무엇이며 또 그에 따른 약속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우치시고 마음에 귀한 양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안식일의 의미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복(福)주시되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날에 친히 안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2:1-3).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네 번째 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출 20:8-10).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편안하게 쉬는 날입니다. 이는 단지 육체적으로 편안히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참된 안식 곧 영적인 안식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위해 먹고 마시며 깊은 수면이나 오락을 취하는 것은 순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하므로 사람에게 참된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지식과 명예, 부귀영화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취했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질병의 고통 속에서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없다면 이것 역시 참된 안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므로(롬 5:12)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요 14:6)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자유함을 얻을 때에야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자 정하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2.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은 오늘날로 보면 토요일이었습니다. 달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일요일이 첫째 날이고 토요일이 한 주의 마지막인 일곱째 날이지요.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고 지금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에서는 여전히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는 왜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갈 3:13) 생명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인 일요일 새벽 미명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마 28:1)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지요(고전15:20). 이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생명과 참된 안식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셨으며(마 12:8) 이 때부터 교회에서는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고전 16:2)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로서 주일(主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에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기쁨과 행복과 안식을 누린다는 의미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여 참생명과 안식을 주게 된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토요일이었던 안식일이 일요일 즉 주일로 바뀌게 될 것을 이미 말씀해 놓고 계십니다. 레위기 23:10-12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우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했지요.
여기서 안식일 이튿날은 바로 그들이 안식일로 지키던 토요일의 다음날인 일요일을 말합니다. 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요. 이처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안식일 이튿날에 여호와께 드리라 했으니 이 예언대로 주님께서는 일요일에 부활하셨고, 이 날이 진정한 기쁨과 감사로써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안식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3.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과 하나님의 축복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엿새동안은 힘써 일하고 주일에는 세상일을 멈추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쉼은 물론 영혼의 안식을 누림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진리 안에서 쉼을 얻고 영적인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서는 우리 영혼에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 새로 시작되는 한 주간 동안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린 후 믿음의 형제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교제할 때 우리의 믿음을 더욱 돈독케 해주십니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하는 성도들에게 사고와 질병, 시험환난이 없도록 막아주시며 한 주간 동안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혹 실수가 있더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세상 욕심을 추구하지 않고 사고파는 매매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세상일을 삼가면서(느 13:15-22) 하나님의 뜻대로 참된 안식을 누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영적 축복 뿐 아니라 범사에 축복을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4.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반면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악(惡)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예배를 드린 후 다시 가게문을 열거나 사업터, 일터의 일을 연장하여도 하나님께서 죄있다 하시지 않지만, 만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분명히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 유익을 좇아간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따라서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진리를 알지 못한 사람이라면 배우고 성장함에 따라 온전히 주일을 지켜가야 하고 또 믿음이 있는 자는 마땅히 가르침 받은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며 사랑으로 병든 자를 고치셨던 것같이(마 10:10-12) 병든 자를 위해 선을 행하는 의사나 국가와 사회를 지키는 군인, 경찰 등 특수한 직업이나 부득이한 공무관계로 주일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 근무한다 해도 주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므로 먼저 예배를 드리고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1. 안식일의 의미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복(福)주시되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날에 친히 안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2:1-3).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네 번째 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출 20:8-10).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편안하게 쉬는 날입니다. 이는 단지 육체적으로 편안히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참된 안식 곧 영적인 안식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위해 먹고 마시며 깊은 수면이나 오락을 취하는 것은 순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하므로 사람에게 참된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지식과 명예, 부귀영화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취했다 하더라도 염려, 근심, 걱정, 질병의 고통 속에서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없다면 이것 역시 참된 안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므로(롬 5:12)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요 14:6)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자유함을 얻을 때에야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자 정하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2.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은 오늘날로 보면 토요일이었습니다. 달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일요일이 첫째 날이고 토요일이 한 주의 마지막인 일곱째 날이지요.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고 지금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에서는 여전히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는 왜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갈 3:13) 생명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인 일요일 새벽 미명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마 28:1)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지요(고전15:20). 이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생명과 참된 안식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셨으며(마 12:8) 이 때부터 교회에서는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고전 16:2)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로서 주일(主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에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기쁨과 행복과 안식을 누린다는 의미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여 참생명과 안식을 주게 된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토요일이었던 안식일이 일요일 즉 주일로 바뀌게 될 것을 이미 말씀해 놓고 계십니다. 레위기 23:10-12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우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했지요.
여기서 안식일 이튿날은 바로 그들이 안식일로 지키던 토요일의 다음날인 일요일을 말합니다. 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요. 이처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안식일 이튿날에 여호와께 드리라 했으니 이 예언대로 주님께서는 일요일에 부활하셨고, 이 날이 진정한 기쁨과 감사로써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안식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3.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과 하나님의 축복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엿새동안은 힘써 일하고 주일에는 세상일을 멈추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쉼은 물론 영혼의 안식을 누림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진리 안에서 쉼을 얻고 영적인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서는 우리 영혼에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 새로 시작되는 한 주간 동안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린 후 믿음의 형제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교제할 때 우리의 믿음을 더욱 돈독케 해주십니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하는 성도들에게 사고와 질병, 시험환난이 없도록 막아주시며 한 주간 동안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혹 실수가 있더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세상 욕심을 추구하지 않고 사고파는 매매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세상일을 삼가면서(느 13:15-22) 하나님의 뜻대로 참된 안식을 누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영적 축복 뿐 아니라 범사에 축복을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4.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반면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악(惡)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예배를 드린 후 다시 가게문을 열거나 사업터, 일터의 일을 연장하여도 하나님께서 죄있다 하시지 않지만, 만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분명히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 유익을 좇아간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따라서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진리를 알지 못한 사람이라면 배우고 성장함에 따라 온전히 주일을 지켜가야 하고 또 믿음이 있는 자는 마땅히 가르침 받은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며 사랑으로 병든 자를 고치셨던 것같이(마 10:10-12) 병든 자를 위해 선을 행하는 의사나 국가와 사회를 지키는 군인, 경찰 등 특수한 직업이나 부득이한 공무관계로 주일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 근무한다 해도 주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므로 먼저 예배를 드리고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찬양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과연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찬양의 사전적 의미는 '훌륭함을 기리어 드러냄' 입니다. 그러나 찬양의 성경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및 그분의 모든 행사를 시, 노래, 여러 악기들의 연주 및 춤 등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150장 3-5절에는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음악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래를 많이 부른다고 해도 영혼이 잘 되는 축복이 임한다거나 사업터나 일터에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또는 영광을 돌리기 위해 드리는 찬양은 생명이 있기에 우리의 삶에 기쁨을 주고, 영혼이 잘 되게 하므로 갖가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6절을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했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참생명을 얻었고 영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속의 은혜와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찬송 중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시 22:3). 따라서 곡조 있는 기도인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
1)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찬양
찬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회개의 찬양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지 못하여 죄를 지음으로 충만함이 떨어지니 곤고함 속에서 드리는 슬픔의 찬양을 말합니다.
둘째로는 사명감당을 위한 찬양입니다.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드리는 찬양이지요.
셋째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참생명의 찬양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증거하다가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고 착고에 채인 채 깊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는 고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찬송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옥문을 여시고 착고를 풀어 주시며 간수의 가정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로 함께하신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을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2) 마음 중심을 다해 드리는 찬양
찬양에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살아 역사하는 영혼의 찬양이 있는가 하면, 비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한다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기로운 찬양을 올릴 때 기뻐 받으십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 중심에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겸비한다면 최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 중심을 다한 찬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거룩하고 흠 없는 상태에서의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흠과 티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며 사랑 자체가 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도 악이 전혀 없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하며 또한 찬양하는 사람의 외모도 깨끗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둘째로, 기도로 준비된 찬양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추진하려고 할 때에도 만반의 준비가 선행되어야 하듯이 아름답고 은혜로운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찬양하는 곡과 가사 등 분야 분야를 정성껏 준비하되 무엇보다도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따라서 마음 중심의 찬양을 부르기 위해서는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4:15). 그래야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벗어 버림으로 마음에 평강이 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령의 감동함 속에 드리는 찬양입니다.
찬양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고 감동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찬양하는 사람이 먼저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은혜로운 찬양을 할 수 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은혜가 될 수 있는 영혼이 담긴 감동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우리에게 충만함을 주어 영혼을 살찌우며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꾸어 줍니다. 즉 슬플 때에 충만함과 기쁨을 주고(시 105:2, 3), 상한 마음을 치료받으며(삼상 16:23),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벧전 1:3-7).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행 16:25, 26), 어떤 상황에서도 수치를 당치 않게 되고(욜 2:26),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는 등 많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50장 3-5절에는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음악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래를 많이 부른다고 해도 영혼이 잘 되는 축복이 임한다거나 사업터나 일터에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또는 영광을 돌리기 위해 드리는 찬양은 생명이 있기에 우리의 삶에 기쁨을 주고, 영혼이 잘 되게 하므로 갖가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6절을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했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참생명을 얻었고 영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속의 은혜와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찬송 중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시 22:3). 따라서 곡조 있는 기도인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
1)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찬양
찬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회개의 찬양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지 못하여 죄를 지음으로 충만함이 떨어지니 곤고함 속에서 드리는 슬픔의 찬양을 말합니다.
둘째로는 사명감당을 위한 찬양입니다.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드리는 찬양이지요.
셋째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참생명의 찬양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증거하다가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고 착고에 채인 채 깊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는 고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찬송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옥문을 여시고 착고를 풀어 주시며 간수의 가정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로 함께하신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을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2) 마음 중심을 다해 드리는 찬양
찬양에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살아 역사하는 영혼의 찬양이 있는가 하면, 비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한다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기로운 찬양을 올릴 때 기뻐 받으십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 중심에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겸비한다면 최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 중심을 다한 찬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거룩하고 흠 없는 상태에서의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흠과 티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며 사랑 자체가 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도 악이 전혀 없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하며 또한 찬양하는 사람의 외모도 깨끗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둘째로, 기도로 준비된 찬양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추진하려고 할 때에도 만반의 준비가 선행되어야 하듯이 아름답고 은혜로운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찬양하는 곡과 가사 등 분야 분야를 정성껏 준비하되 무엇보다도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따라서 마음 중심의 찬양을 부르기 위해서는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4:15). 그래야만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벗어 버림으로 마음에 평강이 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령의 감동함 속에 드리는 찬양입니다.
찬양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고 감동함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찬양하는 사람이 먼저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은혜로운 찬양을 할 수 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은혜가 될 수 있는 영혼이 담긴 감동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우리에게 충만함을 주어 영혼을 살찌우며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꾸어 줍니다. 즉 슬플 때에 충만함과 기쁨을 주고(시 105:2, 3), 상한 마음을 치료받으며(삼상 16:23),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벧전 1:3-7).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행 16:25, 26), 어떤 상황에서도 수치를 당치 않게 되고(욜 2:26),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는 등 많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간혹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행하셨을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깁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담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짤막하게 축약된 성경 몇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류 최초의 기원과 종말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들을 기록하되 자세히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매우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 25절에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을 대할 때에 보다 넓고 깊이 있는 안목으로 대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흠과 티가 없으신 진리 자체이시니 한 치의 오차와 오류도 없이 모든 일을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을까요?
1. 가인과 아벨의 제사방법
가인과 아벨은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다가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과거를 회상하며 그의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등등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된 모든 인류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상태가 아니므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짐승을 잡아서 그 피로 죄사함을 받는 피의 제사였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서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며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 가인은 농사짓는 일을 하기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일을 하였으므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은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가인의 제사
레위기 1:2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 소나 양으로 피의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레위기 23:10-12을 보면 땅의 소산으로 드릴 경우,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리되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함께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가르침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땅의 소산을 취하여 적당히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드린 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더니 결국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동생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하는 것이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인데 가인은 회개하며 기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분을 내며 살인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인과 같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아니하시는 형식적이고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여 지켜 행하려 하지 않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아도 행치 아니하고 여전히 세상과 짝하며 산다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으로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
히브리서 11:4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정성껏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으며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기 때문에(히 9:22) 하나님께서는 피의 제사를 원하신 것이요,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요한복음 4:23-24)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축복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로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예물로써 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할 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의를 행하였고, 가인이 악하여 분내며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기에 가인을 대항치 아니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형제를 사랑하고 의를 행한 자요,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늘나라의 상이 큰 것입니다. 우리도 아벨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며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참된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을 대할 때에 보다 넓고 깊이 있는 안목으로 대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흠과 티가 없으신 진리 자체이시니 한 치의 오차와 오류도 없이 모든 일을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을까요?
1. 가인과 아벨의 제사방법
가인과 아벨은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다가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과거를 회상하며 그의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등등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된 모든 인류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상태가 아니므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짐승을 잡아서 그 피로 죄사함을 받는 피의 제사였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서 피의 제사를 기뻐하시며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 가인은 농사짓는 일을 하기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일을 하였으므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은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가인의 제사
레위기 1:2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 소나 양으로 피의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레위기 23:10-12을 보면 땅의 소산으로 드릴 경우,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리되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함께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가르침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땅의 소산을 취하여 적당히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드린 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더니 결국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동생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하는 것이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인데 가인은 회개하며 기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분을 내며 살인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인과 같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아니하시는 형식적이고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여 지켜 행하려 하지 않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아도 행치 아니하고 여전히 세상과 짝하며 산다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으로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
히브리서 11:4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정성껏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으며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기 때문에(히 9:22) 하나님께서는 피의 제사를 원하신 것이요,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요한복음 4:23-24)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축복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성경 66권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로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예물로써 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할 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의를 행하였고, 가인이 악하여 분내며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기에 가인을 대항치 아니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형제를 사랑하고 의를 행한 자요,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늘나라의 상이 큰 것입니다. 우리도 아벨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며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참된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다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주님을 믿는다고 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인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장 큰 목적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위함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시는 나라이므로 이 세상과는 달리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이 영생복락을 누리는 곳입니다.
이러한 천국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므로 죄가 있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셨으며,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에 이를 것을 약속하신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라 할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1장 6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해도 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것이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15절을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고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 해도 어떠한 경우에 구원받을 수 없는지를 밝히 깨달아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불법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는다는 고백인데 이러한 고백을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만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 해도 불법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도 보면 알곡과 가라지를 비유하여 알곡은 창고에 들이지만 가라지는 불에 살라버리는 것처럼 세상 끝인 심판 때에도 알곡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가라지 곧 믿는다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짐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불법이란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3장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대로 행치 아니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요,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불의한 자란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곧 불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 외에도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을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범죄하는 것을 말하므로 이것도 불법을 행하는 것이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며 모독한 경우
마태복음 12장 31-32절을 보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훼방이란 마가복음 3장 20-30절에 나와 있듯이 성령의 능력을 사단으로 말미암은 사술(邪術)이라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32절에는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했고, 누가복음 12장 10절에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하고 사람으로 안다는 것이니 사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거나 모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거역하고 모독하는 것이므로 사함을 받을 수 없고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훼방이나 거역, 모독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며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결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성령을 받은 후 타락해서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경우
히브리서 6장 4-6절을 보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인 자들이란 성령을 받은 후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알고, 진리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믿으면서도 세상의 유혹을 받아서 교회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해 타락되어져 현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영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3) 진리를 들어서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가는 경우
히브리서 10장 26-27절을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를 들어서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가는 경우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하자 즉시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 왕은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지만 사울 왕은 버림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나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외면해 버리시기 때문에 성령이 소멸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녕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 타락하여 짐짓 죄를 범하게 되면 성령이 소멸되어 회개할 수 없으니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리게 되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계시록 3:5).
그러나 지식으로는 알았지만 마음 중심에서 믿지 않았던 사람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이 생기게 되면 구원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떠났다 해도 다시 전도를 받아 회개하고 돌이켜서 새롭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한 번 지었다고 해서 단번에 버리시는 것이 아니요, 몇 차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알려주셔도 돌이키지 않고 계속하여 범죄함으로 양심이 화인을 맞아 구원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불법을 행하여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게 되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 오직 진리 가운데 행하는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어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천국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므로 죄가 있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셨으며,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에 이를 것을 약속하신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라 할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1장 6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해도 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것이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15절을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고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 해도 어떠한 경우에 구원받을 수 없는지를 밝히 깨달아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불법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는다는 고백인데 이러한 고백을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만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 해도 불법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도 보면 알곡과 가라지를 비유하여 알곡은 창고에 들이지만 가라지는 불에 살라버리는 것처럼 세상 끝인 심판 때에도 알곡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가라지 곧 믿는다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짐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불법이란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3장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대로 행치 아니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요,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불의한 자란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곧 불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 외에도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을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범죄하는 것을 말하므로 이것도 불법을 행하는 것이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며 모독한 경우
마태복음 12장 31-32절을 보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훼방이란 마가복음 3장 20-30절에 나와 있듯이 성령의 능력을 사단으로 말미암은 사술(邪術)이라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32절에는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했고, 누가복음 12장 10절에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하고 사람으로 안다는 것이니 사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거나 모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거역하고 모독하는 것이므로 사함을 받을 수 없고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훼방이나 거역, 모독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며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결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성령을 받은 후 타락해서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경우
히브리서 6장 4-6절을 보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인 자들이란 성령을 받은 후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알고, 진리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믿으면서도 세상의 유혹을 받아서 교회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해 타락되어져 현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영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3) 진리를 들어서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가는 경우
히브리서 10장 26-27절을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를 들어서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가는 경우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하자 즉시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 왕은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지만 사울 왕은 버림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나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외면해 버리시기 때문에 성령이 소멸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녕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 타락하여 짐짓 죄를 범하게 되면 성령이 소멸되어 회개할 수 없으니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리게 되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계시록 3:5).
그러나 지식으로는 알았지만 마음 중심에서 믿지 않았던 사람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이 생기게 되면 구원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떠났다 해도 다시 전도를 받아 회개하고 돌이켜서 새롭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한 번 지었다고 해서 단번에 버리시는 것이 아니요, 몇 차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알려주셔도 돌이키지 않고 계속하여 범죄함으로 양심이 화인을 맞아 구원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불법을 행하여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게 되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 오직 진리 가운데 행하는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어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는데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친구로부터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신속히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한 삶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날 의학이나 과학의 발달로 많은 질병들이 치료되고 있지만 환자들의 숫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의술로도 해결 못하는 난치병과 불치병이 날로 늘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질병의 문제를 약이나 의술에 의존하려 합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치료를 통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강건한 삶을 영위하려면 질병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치료받는 방법을 알면 신속하고 온전하게 치료받을 뿐아니라 영적인 축복도 더불어 받게 됩니다.
1.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질병에는 원인이 있으므로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의 원인이 바로 '여호와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치 아니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모든 규례를 지키지 않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성경 곳곳에는 질병의 원인이 죄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5:14을 보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였고, 신명기 7:12-15에는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할 때에 받는 복과 불순종할 때에 받는 저주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재앙과 질병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 불순종의 죄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혹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질병이 임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할 때는 죄라 생각되지 않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거나 비도덕적으로 잘못 행하였을 때, 또는 규례를 지키지 못하고 실수를 범했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면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하는 것이요, 자기 몸을 사랑치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은 것이니 죄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2. 믿음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 행해야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치료를 받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어떠한 기적이라도 행하실 수 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모든 질병을 대속해 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치료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중하고 오래된 병이라도 능력의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면 순간에 나음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모든 질병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 해결받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2:3-12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도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각색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문둥병자를 치료하신 능력자라는 소문을 듣고 자기도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면 고침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과 정성을 내보임으로 그 즉시 치료받을 수 있었지요.
잠언 8:17에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치료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2)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치료하는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15-20에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고 하셨으며, 이사야 59:1-3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죄이며 하나님과 담이 되므로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자기 욕심과 정욕을 위해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넷째, 믿음이 없이 의심하며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다섯째,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심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질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미움, 시기, 질투, 불의, 탐욕, 악의, 살인, 분쟁, 비방, 교만, 수군수군하는 것 등 악한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여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로 모든 질병의 균을 태우시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약한 것도 고치시며 죽은 것도 살리시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기도를 받으면 각색 질병이 치료되고 불구자도 정상이 되며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것입니다.
3. 건강을 유지하려면 믿음으로 의 가운데 살아야
신명기 34:7에는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된 자라는 인정을 받았을 정도로(민 12:3,7) 성결되어 의 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므로 175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창세기 25:7). 다니엘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고 채소만 먹었어도 고기와 기름을 먹은 다른 소년들보다 강건하고 지혜로워 바벨론 왕에게까지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단 1장).
이처럼 믿음으로 의 가운데, 진리 가운데 살면 질병에 걸리지 않으며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리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채찍에 맞으시고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심으로(마 8:17) 나음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사 53:5-6, 벧전 2:24).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믿음이 없으니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고 그 죄로 인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지만 믿음 안에 들어와 의 가운데 행하면 온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질병이 떠나고 강건함을 받으며 질병이 틈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치료를 통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강건한 삶을 영위하려면 질병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치료받는 방법을 알면 신속하고 온전하게 치료받을 뿐아니라 영적인 축복도 더불어 받게 됩니다.
1.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질병에는 원인이 있으므로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의 원인이 바로 '여호와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치 아니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모든 규례를 지키지 않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성경 곳곳에는 질병의 원인이 죄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5:14을 보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였고, 신명기 7:12-15에는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할 때에 받는 복과 불순종할 때에 받는 저주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재앙과 질병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 불순종의 죄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혹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질병이 임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할 때는 죄라 생각되지 않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거나 비도덕적으로 잘못 행하였을 때, 또는 규례를 지키지 못하고 실수를 범했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면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하는 것이요, 자기 몸을 사랑치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은 것이니 죄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2. 믿음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 행해야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치료를 받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어떠한 기적이라도 행하실 수 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모든 질병을 대속해 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치료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중하고 오래된 병이라도 능력의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면 순간에 나음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모든 질병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 해결받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2:3-12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도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각색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문둥병자를 치료하신 능력자라는 소문을 듣고 자기도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면 고침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과 정성을 내보임으로 그 즉시 치료받을 수 있었지요.
잠언 8:17에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치료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2)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치료하는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15-20에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고 하셨으며, 이사야 59:1-3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죄이며 하나님과 담이 되므로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자기 욕심과 정욕을 위해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넷째, 믿음이 없이 의심하며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다섯째,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심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질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미움, 시기, 질투, 불의, 탐욕, 악의, 살인, 분쟁, 비방, 교만, 수군수군하는 것 등 악한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여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영혼이 잘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로 모든 질병의 균을 태우시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약한 것도 고치시며 죽은 것도 살리시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기도를 받으면 각색 질병이 치료되고 불구자도 정상이 되며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것입니다.
3. 건강을 유지하려면 믿음으로 의 가운데 살아야
신명기 34:7에는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된 자라는 인정을 받았을 정도로(민 12:3,7) 성결되어 의 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므로 175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창세기 25:7). 다니엘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고 채소만 먹었어도 고기와 기름을 먹은 다른 소년들보다 강건하고 지혜로워 바벨론 왕에게까지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단 1장).
이처럼 믿음으로 의 가운데, 진리 가운데 살면 질병에 걸리지 않으며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리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채찍에 맞으시고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심으로(마 8:17) 나음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사 53:5-6, 벧전 2:24).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믿음이 없으니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고 그 죄로 인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지만 믿음 안에 들어와 의 가운데 행하면 온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질병이 떠나고 강건함을 받으며 질병이 틈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후 성령 충만함을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때론 기도의 응답이 신속하게 오지 않아 답답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신속하게 응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7-8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교훈하시며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므로 영이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구해야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의 명예와 지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1. 영계의 법칙에 따라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므로(시 7:11) 그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되 영계의 법칙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해 주십니다. 아무리 자녀라 할지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당한 값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은 마치 정육점의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 고기를 사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정육점 주인을 하나님께 비유한다면 저울은 기도응답에 대한 영계의 법칙을 좇아 응답의 여부를 알려 주는 기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시되 정육점의 주인처럼 반드시 그 값을 받고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응답에 대한 영계의 법칙이요, 하나님 안에서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많은 기도를 했어도 아직 응답을 받지 못했다면 그에 상당한 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응답을 받을 만한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며 영계의 법칙에 합당한 양을 채워야 합니다. 이렇게 행할 때 기도의 응답에 필요한 양이 채워져 응답받을 만한 믿음이 주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응답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좇아 응답받기 위해 작정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응답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작정기도가 끝나도 응답받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지금 당장 응답을 주어도 끝까지 충만하게 작정기도를 채울 중심이라고 인정이 되면 작정이 끝나지 않았어도 응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응답을 받아야 할 문제인데 응답받지 못했다면 아직 응답받을 만한 중심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똑같은 문제를 놓고 기도해도 각 사람마다 성결의 차원이 다르고 온전히 믿어지는 믿음의 분량이 다르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의 양이 다른 것이요(계 5:8), 한 달 만에 응답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만에 응답을 받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응답을 받으려 한다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즉 무엇을 놓고 기도할 때 그것에 상응하는 기도의 양을 채우며 하나님과 담이 없이 깨끗한 심령이 되어야 하고 감사와 기쁨과 예물 등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감동시켜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일곱 영으로 감찰하여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응답
앞서 설명한 저울의 비유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정확히 기도의 양을 재시고 응답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판단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사물을 감찰할 때 육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신 일곱 영으로서 정확히 감찰하십니다(계 5:6).
일곱 영이란 성경 66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요, 이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감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영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 가지를 측정하여 합격 판정이 내려지면 하나님 앞에 합한 중심이라는 인정을 받아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을 측정합니다.
믿음은 크게 영적인 믿음과 육적인 믿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곱 영이 측정하는 믿음은 지식적인 육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동반되는 영적인 믿음입니다(약 2:22).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믿나이다"라고 육적인 믿음을 고백하며 영적인 믿음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영적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히 11:6)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고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자신의 믿음이 영적인 믿음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기쁨을 측정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항상 기뻐하라"고 했으니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려움을 당하면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 걱정 가운데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도 개의치 않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기에 참된 기쁨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를 측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말씀하시며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39-4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습관을 좇아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기도에 임하게 되면 자연히 중심을 바쳐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며 믿음과 사랑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영을 통해 바로 이러한 것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기도하고 싶을 때나 기쁠 때, 혹은 슬플 때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습관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로, 감사를 측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응답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다면 마음 중심에서 감사하게 됩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영생복락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시고 구하는 사람에게 응답해 주시니 더욱 감사한 것이요, 혹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 할지라도 이 땅의 것은 잠시잠깐이요,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니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영은 얼마나 진정한 감사를 하는가를 측정합니다.
다섯째로, 계명들을 지켜 행하는가를 측정합니다.
요한일서 5장 2-3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습관을 좇아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믿음에 의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니 그분 말씀대로 준행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성경은 '동쪽으로 가라' 하는데 서쪽으로 가면서 응답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진 대로 믿고 준행하면 될 터인데 그 말씀을 무시하고 내 생각에 맞추어 내 유익을 좇아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부산의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기차 타기가 불편하고 귀찮다고 내 유익을 좇아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터미널에서 기다린다면 만나기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요 14:15 , 요일 5:3).
따라서 일곱 영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들을 얼마나 마음 중심으로 지켜 행하는가를 측정합니다.
여섯째로, 충성을 측정합니다.
민수기 12장 7절을 보면 모세는 온 집에 충성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한 분야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같이 온 집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사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충성하되 가정이나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성해야 합니다.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되니 신속하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 영은 얼마나 온 집에 충성하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영적인 사랑을 측정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믿음과 기쁨이 있고 기도와 감사가 있으며 계명들을 지키며 충성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신속하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일곱 영이 측정할 때 모든 분야에서 합격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기도의 응답을 주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적은 초신자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믿음을 내보이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응답해 주시지만, 믿음이 장성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양을 채웠을 때 비로소 감동하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장성할수록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니 더욱 신속하게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신자가 오히려 신속하게 응답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가 넘치는 초신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신속하게 일곱 영에 합당하게 행함으로 즉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항상 성령 충만함을 입어 열심히 진리대로 행함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신속하게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므로 영이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구해야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의 명예와 지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1. 영계의 법칙에 따라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므로(시 7:11) 그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되 영계의 법칙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해 주십니다. 아무리 자녀라 할지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당한 값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은 마치 정육점의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 고기를 사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정육점 주인을 하나님께 비유한다면 저울은 기도응답에 대한 영계의 법칙을 좇아 응답의 여부를 알려 주는 기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시되 정육점의 주인처럼 반드시 그 값을 받고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응답에 대한 영계의 법칙이요, 하나님 안에서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많은 기도를 했어도 아직 응답을 받지 못했다면 그에 상당한 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응답을 받을 만한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며 영계의 법칙에 합당한 양을 채워야 합니다. 이렇게 행할 때 기도의 응답에 필요한 양이 채워져 응답받을 만한 믿음이 주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응답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좇아 응답받기 위해 작정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응답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작정기도가 끝나도 응답받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지금 당장 응답을 주어도 끝까지 충만하게 작정기도를 채울 중심이라고 인정이 되면 작정이 끝나지 않았어도 응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응답을 받아야 할 문제인데 응답받지 못했다면 아직 응답받을 만한 중심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똑같은 문제를 놓고 기도해도 각 사람마다 성결의 차원이 다르고 온전히 믿어지는 믿음의 분량이 다르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의 양이 다른 것이요(계 5:8), 한 달 만에 응답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만에 응답을 받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응답을 받으려 한다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즉 무엇을 놓고 기도할 때 그것에 상응하는 기도의 양을 채우며 하나님과 담이 없이 깨끗한 심령이 되어야 하고 감사와 기쁨과 예물 등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감동시켜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일곱 영으로 감찰하여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응답
앞서 설명한 저울의 비유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정확히 기도의 양을 재시고 응답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판단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사물을 감찰할 때 육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신 일곱 영으로서 정확히 감찰하십니다(계 5:6).
일곱 영이란 성경 66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요, 이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감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영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 가지를 측정하여 합격 판정이 내려지면 하나님 앞에 합한 중심이라는 인정을 받아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을 측정합니다.
믿음은 크게 영적인 믿음과 육적인 믿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곱 영이 측정하는 믿음은 지식적인 육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동반되는 영적인 믿음입니다(약 2:22).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의 아비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믿나이다"라고 육적인 믿음을 고백하며 영적인 믿음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영적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히 11:6)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고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자신의 믿음이 영적인 믿음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기쁨을 측정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항상 기뻐하라"고 했으니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려움을 당하면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 걱정 가운데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도 개의치 않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기에 참된 기쁨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를 측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말씀하시며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39-4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습관을 좇아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기도에 임하게 되면 자연히 중심을 바쳐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며 믿음과 사랑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영을 통해 바로 이러한 것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기도하고 싶을 때나 기쁠 때, 혹은 슬플 때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습관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로, 감사를 측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응답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다면 마음 중심에서 감사하게 됩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영생복락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시고 구하는 사람에게 응답해 주시니 더욱 감사한 것이요, 혹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 할지라도 이 땅의 것은 잠시잠깐이요,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니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영은 얼마나 진정한 감사를 하는가를 측정합니다.
다섯째로, 계명들을 지켜 행하는가를 측정합니다.
요한일서 5장 2-3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습관을 좇아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믿음에 의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니 그분 말씀대로 준행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성경은 '동쪽으로 가라' 하는데 서쪽으로 가면서 응답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진 대로 믿고 준행하면 될 터인데 그 말씀을 무시하고 내 생각에 맞추어 내 유익을 좇아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부산의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기차 타기가 불편하고 귀찮다고 내 유익을 좇아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터미널에서 기다린다면 만나기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요 14:15 , 요일 5:3).
따라서 일곱 영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들을 얼마나 마음 중심으로 지켜 행하는가를 측정합니다.
여섯째로, 충성을 측정합니다.
민수기 12장 7절을 보면 모세는 온 집에 충성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한 분야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같이 온 집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사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충성하되 가정이나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성해야 합니다.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되니 신속하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 영은 얼마나 온 집에 충성하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영적인 사랑을 측정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믿음과 기쁨이 있고 기도와 감사가 있으며 계명들을 지키며 충성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신속하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일곱 영이 측정할 때 모든 분야에서 합격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기도의 응답을 주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적은 초신자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믿음을 내보이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응답해 주시지만, 믿음이 장성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양을 채웠을 때 비로소 감동하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장성할수록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니 더욱 신속하게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신자가 오히려 신속하게 응답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가 넘치는 초신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신속하게 일곱 영에 합당하게 행함으로 즉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항상 성령 충만함을 입어 열심히 진리대로 행함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신속하게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물질로 심으면 물질로 거두게 된다는 말씀을 듣고 힘껏 물질로 심으며 마음껏 구제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히 믿고 기도했는데도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 응답의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가을이 되면 우리는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추수를 기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농부가 땀흘리며 씨를 심고 벌레를 잡아주면서 열심히 가꾸어 온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땀흘리며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되 심은 대로 거두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물질을 심어야 합니다. 만일 물질을 심었는데도 아직 거두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물질 축복을 받으려면 심고 거두는 법칙에 따라 물질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게 된다고 가르쳐 주신 원리를 좇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 감사헌금은 당연히 심어야 하고 건축헌금, 작정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그리고 여러 가지 선행을 위한 물질도 심어야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마가복음 12장 41절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성전 연보 궤에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는 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칭찬하시며 "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후에 큰 축복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지요. 많든 적든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기쁜 마음으로 힘써 드리기를 즐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심지 않았다면 자기의 유익을 좇아 심었기에 후에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물질을 심었다고 생각되는데도 여전히 축복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시돈 사람 사르밧 과부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밖에 남은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사랑받는 선지자인 엘리야가 축복을 약속하며 그것을 심으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심었기에 가뭄이 끝날 때까지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관하실 때 순종하여 심는 것도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일에는 순종하지 않고 자기 임의로 심고 자기 본위로 행하였다면 그만큼 축복을 더디 받게 되지요. 더 나아가 하나님께 작정한 것이 있다면 더디 말고 신속히 드려야 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한 것을 다른 데로 융통하였거나 혹은 성령께서 마음에 작정케 하신 것을 스스로 파기하고 변개하지는 않았는지, 또 마음에 주관이 온 대로 심지 않고 적게 심지는 않았는지, 더 나아가 사람과의 사이에 있어서도 심기로 약속한 것을 저버리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열심히 심어도 축복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
1) 그릇을 만드신 후에 주시기 위한 경우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먼저 그릇을 만드시고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담을 수가 없으니 주실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먼저 그릇을 만들기 위한 연단을 하시고 때가 이르러 축복을 주시므로 열심히 심어도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낙심치 말고 축복받기에 합당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힘쓰면 때가 이르매 많은 열매로 거두게 되지요.
2) 이미 축복을 주셨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
자신이 보기에는 물질 축복이 임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어떻게든 거두게 하시는데 단지 사람 편에서 어떻게 축복하셨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질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 주시는 경우도 있고, 작은 축복을 여러 번에 걸쳐 받기도 하지만 마음 중심에서 심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심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셔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치 못하는 것뿐입니다.
3) 억지로 심었기에 역사가 따르지 않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시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믿음으로 심어야 축복을 받는 것이지 믿음이 없이 억지로 심으면 물질의 축복이 따르지 않습니다. 억지로 물질을 심고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중심이 되어 믿음으로 행하면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4) 물질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경우
어린 아이가 칼을 들고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칼을 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물질이 많으면 이내 세상으로 빠져 원수 마귀의 역사가 따르기 쉬운 사람에게는 주시는 것을 삼가하시는 것입니다(딤전 6:9 이하 참조).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으로 심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많은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땀흘리며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되 심은 대로 거두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물질을 심어야 합니다. 만일 물질을 심었는데도 아직 거두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물질 축복을 받으려면 심고 거두는 법칙에 따라 물질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게 된다고 가르쳐 주신 원리를 좇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 감사헌금은 당연히 심어야 하고 건축헌금, 작정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그리고 여러 가지 선행을 위한 물질도 심어야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마가복음 12장 41절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성전 연보 궤에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는 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칭찬하시며 "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후에 큰 축복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지요. 많든 적든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기쁜 마음으로 힘써 드리기를 즐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심지 않았다면 자기의 유익을 좇아 심었기에 후에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물질을 심었다고 생각되는데도 여전히 축복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시돈 사람 사르밧 과부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밖에 남은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사랑받는 선지자인 엘리야가 축복을 약속하며 그것을 심으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심었기에 가뭄이 끝날 때까지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관하실 때 순종하여 심는 것도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일에는 순종하지 않고 자기 임의로 심고 자기 본위로 행하였다면 그만큼 축복을 더디 받게 되지요. 더 나아가 하나님께 작정한 것이 있다면 더디 말고 신속히 드려야 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한 것을 다른 데로 융통하였거나 혹은 성령께서 마음에 작정케 하신 것을 스스로 파기하고 변개하지는 않았는지, 또 마음에 주관이 온 대로 심지 않고 적게 심지는 않았는지, 더 나아가 사람과의 사이에 있어서도 심기로 약속한 것을 저버리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열심히 심어도 축복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
1) 그릇을 만드신 후에 주시기 위한 경우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먼저 그릇을 만드시고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담을 수가 없으니 주실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먼저 그릇을 만들기 위한 연단을 하시고 때가 이르러 축복을 주시므로 열심히 심어도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낙심치 말고 축복받기에 합당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힘쓰면 때가 이르매 많은 열매로 거두게 되지요.
2) 이미 축복을 주셨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
자신이 보기에는 물질 축복이 임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므로 어떻게든 거두게 하시는데 단지 사람 편에서 어떻게 축복하셨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질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 주시는 경우도 있고, 작은 축복을 여러 번에 걸쳐 받기도 하지만 마음 중심에서 심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심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셔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치 못하는 것뿐입니다.
3) 억지로 심었기에 역사가 따르지 않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시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믿음으로 심어야 축복을 받는 것이지 믿음이 없이 억지로 심으면 물질의 축복이 따르지 않습니다. 억지로 물질을 심고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중심이 되어 믿음으로 행하면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4) 물질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경우
어린 아이가 칼을 들고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칼을 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물질이 많으면 이내 세상으로 빠져 원수 마귀의 역사가 따르기 쉬운 사람에게는 주시는 것을 삼가하시는 것입니다(딤전 6:9 이하 참조).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으로 심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많은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복음이 들어오기 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전에 살았던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첫사람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하여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있는 이 세상에서 죄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아무 죄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화목제물을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복된 소식이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나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곳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1. 양심이 증거가 되는 양심심판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생령 곧 살아있는 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후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마음 안에 죄가 들어와 환경을 통해 보고 들으며 나름대로 지식을 쌓아가게 되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관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을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면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영의 마음과 죄로 인하여 들어온 비진리의 마음, 또한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양심이라는 세가지 마음으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7:22-23).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행위에 따라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셨습니다.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마음에 심겨진 의의 도, 곧 양심을 좇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양심의 법이 행위의 기준이 되니 선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악을 행치 아니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로마서 2장 14-15절에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의 법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이 되게 하시고 그 행위에 따라서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양심심판입니다.
2. 선한 양심은 양심심판으로 윗음부에 거하다가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양심을 통해 신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자연만물의 오묘한 변화와 조화를 보면서 조물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선을 좇아 살았습니다. 또한 양심에서 내세가 있음을 증거하므로 현세의 쾌락을 좇아 자기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을 지키며 절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율곡 선생, 이순신 장군이나 유관순 열사와 같은 분들의 경우를 보아도 참으로 선한 양심을 지녔기 때문에 신을 찾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어도 위로는 신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였고, 이율곡 선생은 하늘의 지혜를 받아 외적의 침입을 예감하고 10만 양병설 등을 나라에 건의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 대기하던 윗음부와 아래음부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았지만 마음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았지만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들은 모두 복음을 듣지 못하였지만 선한 양심을 지닌 나사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윗음부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렇지 못한 부자는 아랫음부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4장 9절을 보면 악인들이 그의 영화를 잃어버리고 고통 중에 있는 곳인 아래 음부가 나옵니다. 아래 음부는 악인들이 고통을 받는 곳이지만 거지 나사로가 의인 아브라함과 함께 있던 윗음부는 창세이래로 마음이 선하여 양심 심판을 통해 구원받은 영혼들이 편안하게 있는 곳입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영들의 전도를 받아 구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에 3일 동안 음부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곧 윗음부에 있는 구원받을만한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므로 그동안 복음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장 40절에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했고 에베소서 4장 9절에는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도 죽으면 3일 동안 윗음부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을 듣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영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에 감사하며 더욱 행함있는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아무 죄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화목제물을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복된 소식이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나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곳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1. 양심이 증거가 되는 양심심판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생령 곧 살아있는 영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후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마음 안에 죄가 들어와 환경을 통해 보고 들으며 나름대로 지식을 쌓아가게 되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관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을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면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영의 마음과 죄로 인하여 들어온 비진리의 마음, 또한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양심이라는 세가지 마음으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7:22-23).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행위에 따라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셨습니다.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마음에 심겨진 의의 도, 곧 양심을 좇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양심의 법이 행위의 기준이 되니 선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악을 행치 아니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로마서 2장 14-15절에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의 법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이 되게 하시고 그 행위에 따라서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양심심판입니다.
2. 선한 양심은 양심심판으로 윗음부에 거하다가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양심을 통해 신을 인정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자연만물의 오묘한 변화와 조화를 보면서 조물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선을 좇아 살았습니다. 또한 양심에서 내세가 있음을 증거하므로 현세의 쾌락을 좇아 자기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을 지키며 절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율곡 선생, 이순신 장군이나 유관순 열사와 같은 분들의 경우를 보아도 참으로 선한 양심을 지녔기 때문에 신을 찾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어도 위로는 신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였고, 이율곡 선생은 하늘의 지혜를 받아 외적의 침입을 예감하고 10만 양병설 등을 나라에 건의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 대기하던 윗음부와 아래음부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았지만 마음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았지만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들은 모두 복음을 듣지 못하였지만 선한 양심을 지닌 나사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윗음부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렇지 못한 부자는 아랫음부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4장 9절을 보면 악인들이 그의 영화를 잃어버리고 고통 중에 있는 곳인 아래 음부가 나옵니다. 아래 음부는 악인들이 고통을 받는 곳이지만 거지 나사로가 의인 아브라함과 함께 있던 윗음부는 창세이래로 마음이 선하여 양심 심판을 통해 구원받은 영혼들이 편안하게 있는 곳입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영들의 전도를 받아 구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에 3일 동안 음부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곧 윗음부에 있는 구원받을만한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므로 그동안 복음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장 40절에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했고 에베소서 4장 9절에는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도 죽으면 3일 동안 윗음부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을 듣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영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에 감사하며 더욱 행함있는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지난 호에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으로 창조된 천사들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타락한 천사들과 악의 영들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수많은 천사장과 천사들을 만드시고 질서와 서열을 정하시며 역할을 분담해 주셨고, 이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마치 로봇과 같이 명령에 따라 움직여지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세 천사에게는 예외적으로 인성을 주시고 천사장과 같은 위치에서 마음으로 섬기며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성부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으로 기쁘시게 했던 루시퍼가 차츰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힘입어 그를 따르던 천사들은 물론,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던 용들과 그의 사자들을 거짓으로 속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타락하게 된 천사들은 하늘에서 쫓겨나 무저갱에 갇히게 되었고,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을 통하여 참자녀를 얻고자 루시퍼에게 권세를 주시고 어두움의 주관자로서 악의 영들을 지시하고 조종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루시퍼는 악한 영의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사들의 조직을 본따 악의 영들의 조직을 만들고 그들을 통하여 어찌하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사회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범죄하도록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음악이나 컴퓨터 등 세상적인 큰 흐름을 따라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거나 악한 권세자들을 주관하여 공산주의 국가와 같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란 루시퍼가 아니라 바로 밑에 있는 용들을 의미하며 우리가 사단과 마귀, 귀신 등 악한 영의 세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 루시퍼로부터 실질적인 권세를 받아
공중에서 어두움의 세력을 다스리는 용들과 그의 사자들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는 자기를 믿고 따랐던 용들에게 실질적인 권세를 주어 수하에 있는 사자들을 다스리며 하나님께 속한 영들과 악의 영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공중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용들은 루시퍼의 계획대로 어두움의 일들을 주관하고 있지만 일일이 루시퍼의 지시를 받지는 않습니다. 이미 루시퍼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용들의 마음 안에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용들은 실질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우두머리로서 항상 경배받는 위치에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용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을 주관하여 곳곳에 용의 문양을 새기거나 조각해 넣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나 갖가지 우상 숭배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용들은 악한 집단의 머리급들에게 역사하여 악을 크게 행하게 하거나 어찌하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사망에 이르도록 만들어 갑니다. 또한 이단의 교주나 기타 하나님의 역사를 사칭하는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역사하게 되는데 주로 자기 수하에 심복처럼 부리는 사자들을 동원하여 악한 일들을 이루어 갑니다.
그의 사자들이란 타락하기 이전에 용들의 수하에 있던 그룹들의 일부로서 용들을 도와 어두움의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권세 또한 용에 못지 않게 큰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용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흉측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2. 사단, 마귀, 귀신의 정체와 그 역할
먼저, 사단은 루시퍼의 마음과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적인 존재로서 근본적으로는 루시퍼와 하나이지만, 루시퍼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게 하고 악한 일들을 행하게 하는 어두움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요.
그러면 사단은 어떠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일까요? 사단은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게 되므로 생각이 바로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사단은 마치 공중에 수없이 퍼져 있는 전파와 같아서 사단이 가지고 있는 어둠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어두움을 행하게 하는 능력을 계속해서 공중에 퍼뜨리고 있는데 이 때 안테나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어두움의 마음입니다.
만일 사단이 퍼뜨려 놓은 어두움의 전파와 사람의 마음에 있는 어두움이라는 안테나가 서로 주파수를 맞추게 되면 사단은 생각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두움의 능력을 불어넣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역사를 받았다.', 또는 '사단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는 것인데 어느 정도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면 사단은 그 배턴을 마귀에게 넘기게 됩니다. 즉, 마귀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다음으로, 마귀는 타락한 천사들 중의 일부이며 어두움 가운데 마음을 내어 준 사람들을 주관하여 실질적인 행함으로 죄를 짓도록 만드는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마귀 또는 마귀의 자식이라 표현했으며(요 6:70 ,행 13:10) 불법과 악을 행하는 것을 '마귀 짓을 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 짓에도 단계가 있어 혈기나 다툼, 사소한 거짓말과 같은 것에서부터 사람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등 차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짐승과 같은 행동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 짓들이 자꾸 쌓여 어느 한계를 넘게 되면 귀신이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마귀는 귀신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이며 귀신들을 다스리는 실권을 가지고 있어서 수많은 귀신들을 관리하고 지시하여 사람들에게 갖가지 고통과 환난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물론 점점 악으로 빠져 들어가도록 만듭니다. 어떤 경우는 마귀가 사람을 아예 사로잡고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판 무당이나 박수, 그리고 술객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중에서 그 영혼이 아랫음부로 가지 못하고 이 땅에 버려진 경우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고자 방황하게 되며, 일단 귀신이 들어가면 좀처럼 나가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머리와 같이 그 영혼에 붙어서 끝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합니다.
이처럼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는 경우는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는 자신의 악함이나 교만함 등으로 인해 마귀 짓이 어느 한계를 지나쳐서 그 악이 심히 정도를 넘는 경우입니다. 다음으로는 조상이나 부모가 심히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하여 자녀들에게 귀신이 들어가는 경우, 마지막으로 성결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교만에 빠져 자기를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해 은사와 능력을 구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직접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게 되므로 귀신들린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동하며 귀신의 꼭두각시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악한 영의 세계를 밝히 알아 항상 깨어 근신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세 천사에게는 예외적으로 인성을 주시고 천사장과 같은 위치에서 마음으로 섬기며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성부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으로 기쁘시게 했던 루시퍼가 차츰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힘입어 그를 따르던 천사들은 물론,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던 용들과 그의 사자들을 거짓으로 속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타락하게 된 천사들은 하늘에서 쫓겨나 무저갱에 갇히게 되었고,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을 통하여 참자녀를 얻고자 루시퍼에게 권세를 주시고 어두움의 주관자로서 악의 영들을 지시하고 조종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루시퍼는 악한 영의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사들의 조직을 본따 악의 영들의 조직을 만들고 그들을 통하여 어찌하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사회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범죄하도록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음악이나 컴퓨터 등 세상적인 큰 흐름을 따라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거나 악한 권세자들을 주관하여 공산주의 국가와 같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란 루시퍼가 아니라 바로 밑에 있는 용들을 의미하며 우리가 사단과 마귀, 귀신 등 악한 영의 세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 루시퍼로부터 실질적인 권세를 받아
공중에서 어두움의 세력을 다스리는 용들과 그의 사자들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는 자기를 믿고 따랐던 용들에게 실질적인 권세를 주어 수하에 있는 사자들을 다스리며 하나님께 속한 영들과 악의 영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공중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용들은 루시퍼의 계획대로 어두움의 일들을 주관하고 있지만 일일이 루시퍼의 지시를 받지는 않습니다. 이미 루시퍼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용들의 마음 안에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용들은 실질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우두머리로서 항상 경배받는 위치에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용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을 주관하여 곳곳에 용의 문양을 새기거나 조각해 넣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나 갖가지 우상 숭배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용들은 악한 집단의 머리급들에게 역사하여 악을 크게 행하게 하거나 어찌하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사망에 이르도록 만들어 갑니다. 또한 이단의 교주나 기타 하나님의 역사를 사칭하는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역사하게 되는데 주로 자기 수하에 심복처럼 부리는 사자들을 동원하여 악한 일들을 이루어 갑니다.
그의 사자들이란 타락하기 이전에 용들의 수하에 있던 그룹들의 일부로서 용들을 도와 어두움의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권세 또한 용에 못지 않게 큰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용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흉측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2. 사단, 마귀, 귀신의 정체와 그 역할
먼저, 사단은 루시퍼의 마음과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적인 존재로서 근본적으로는 루시퍼와 하나이지만, 루시퍼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게 하고 악한 일들을 행하게 하는 어두움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요.
그러면 사단은 어떠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일까요? 사단은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게 되므로 생각이 바로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사단은 마치 공중에 수없이 퍼져 있는 전파와 같아서 사단이 가지고 있는 어둠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어두움을 행하게 하는 능력을 계속해서 공중에 퍼뜨리고 있는데 이 때 안테나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어두움의 마음입니다.
만일 사단이 퍼뜨려 놓은 어두움의 전파와 사람의 마음에 있는 어두움이라는 안테나가 서로 주파수를 맞추게 되면 사단은 생각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두움의 능력을 불어넣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역사를 받았다.', 또는 '사단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는 것인데 어느 정도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면 사단은 그 배턴을 마귀에게 넘기게 됩니다. 즉, 마귀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다음으로, 마귀는 타락한 천사들 중의 일부이며 어두움 가운데 마음을 내어 준 사람들을 주관하여 실질적인 행함으로 죄를 짓도록 만드는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마귀 또는 마귀의 자식이라 표현했으며(요 6:70 ,행 13:10) 불법과 악을 행하는 것을 '마귀 짓을 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 짓에도 단계가 있어 혈기나 다툼, 사소한 거짓말과 같은 것에서부터 사람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등 차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짐승과 같은 행동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 짓들이 자꾸 쌓여 어느 한계를 넘게 되면 귀신이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마귀는 귀신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이며 귀신들을 다스리는 실권을 가지고 있어서 수많은 귀신들을 관리하고 지시하여 사람들에게 갖가지 고통과 환난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물론 점점 악으로 빠져 들어가도록 만듭니다. 어떤 경우는 마귀가 사람을 아예 사로잡고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판 무당이나 박수, 그리고 술객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중에서 그 영혼이 아랫음부로 가지 못하고 이 땅에 버려진 경우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고자 방황하게 되며, 일단 귀신이 들어가면 좀처럼 나가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머리와 같이 그 영혼에 붙어서 끝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합니다.
이처럼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는 경우는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는 자신의 악함이나 교만함 등으로 인해 마귀 짓이 어느 한계를 지나쳐서 그 악이 심히 정도를 넘는 경우입니다. 다음으로는 조상이나 부모가 심히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하여 자녀들에게 귀신이 들어가는 경우, 마지막으로 성결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교만에 빠져 자기를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해 은사와 능력을 구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직접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게 되므로 귀신들린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동하며 귀신의 꼭두각시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악한 영의 세계를 밝히 알아 항상 깨어 근신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타락한 천사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으로서 창조된 천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할 수 있으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출애굽기 3:14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말씀하시며 자신을 소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홀로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신성(神性)만이 아니라 인성(人性)도 겸비하셨기에 서로 사랑을 주고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사람을 지으시고 참자녀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 인간경작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을 위한 준비 단계로 우리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를 만들기에 앞서 영의 세계를 만드셨는데, 그 중 하나님을 도울 존재로서 각 분야를 담당하는 수많은 천사장들과 천사들 외에도 천사장과 같은 위치와 위엄을 가진 또 다른 천사들을 만드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보좌하며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한 권세를 주실 뿐 아니라 예외적으로 우리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인성을 주셨으므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고 자유의지 가운데 행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음악을 담당한 루시퍼 천사장이었습니다.
1. 천사들이 타락한 과정
본래 천사라는 존재는 하나님께 속하여 로보트와 같은 역할을 했기에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는 못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루시퍼에게 우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성을 주셔서 천사장과 같은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감미로운 말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즐겁고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무수히 흐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고 높은 권세를 누리다 보니 자유의지 속에 점점 높아지기 원하는 교만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고자 하는 엄청난 교만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악한 영의 세계가 태동되는 시발점이 되어 천사들의 일부도 타락하게 되었는데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을까요?
루시퍼는 교만에 사로잡혀 하나님보다 높아지고자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한 일들을 꾸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가 지닌 권세와 위치가 대단했기에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천사들을 자기 편으로 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용들과 용들의 휘하에 있던 그의 사자들이었는데 용은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 있었던 그룹들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주인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애완 동물과 같아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나게 하는 장식과 같은 존재로서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으며 힘이 있고 권세가 있어 담대하였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지극히 받았던 존재였습니다.
루시퍼가 인성이 있음으로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기쁨과 행복을 드리는 존재였다면 용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귀여움과 사랑을 받는 존재로 큰 권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시퍼는 하나님에 관해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도 용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용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교묘한 계략과 말로써 미혹했습니다.
루시퍼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던 용이 쉽게 자신의 꼬임에 넘어올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지금은 마치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장차는 우리 모두가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미혹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시퍼는 자신의 지휘 아래 있던 천사들과 용을 반란에 끌어들임으로 그의 사자들까지 자기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천사들이 루시퍼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로보트와 같은 존재였고 오직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천사들이었으니 자신의 직속 상관인 용과 루시퍼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주도하는 장군 휘하에 있는 병사들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쿠데타에 가담하여 반란군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2. 하늘에서 쫓겨나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한 루시퍼는 결국 하나님께 패하여 자신의 무리들과 함께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겔 28:16). 그러므로 이사야 14:12-15을 보면 루시퍼에 대하여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다서 1:6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했고, 베드로후서 2:4에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했으니 루시퍼를 따랐던 무리들 또한 하늘에서 쫓겨나 어둡고 깊은 무저갱 속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인간경작을 위하여 루시퍼에게 권세를 주시고 악한 영들의 세계를 지배하에 다스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루시퍼와 용 그의 사자들과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가 무저갱에서 풀려나 공중 권세를 잡게 되었습니다(계 12:7-10).
그러므로 루시퍼는 오늘날도 공중에서 용과 함께 지금 악의 영들의 우두머리로서 수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지시하고 조종하며, 어떻게든지 성도들을 미혹하여 사망으로 이끌어 가고자 힘쓰고 있습니다(벧전 5:8).
3. 악한 영의 세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루시퍼와 그의 천사들, 그리고 용과 그의 사자들이 타락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우리가 인간경작을 통해 선과 사랑과 의를 이루어 하나님께 속한 영의 사람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진리와 반대되는 비진리를 체험하고 이를 통해 참된 진리를 깨우쳐야 합니다. 선과 반대되는 악도 알고 사랑과 반대되는 미움도 배신도 알며, 의와 반대되는 불의도 겪어 봄으로 인해 진리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고 중심에서 깨달아야 변치 않는 참믿음을 가진 자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을 위하여 비진리를 주관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함을 아시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에게 어두움의 권세를 주신 것이지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루시퍼의 존재는 마치 농작물을 가꿀 때 필요한 비료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비료는 몸에 해로운 독성 물질이 들어 있어서 사람이 직접 먹으면 죽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것을 농작물에 뿌려 주면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루시퍼는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단번에 멸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께서는 알곡된 참자녀를 얻기 위해 루시퍼의 배신과 그의 교만, 그리고 그 휘하에 있는 악한 영들의 역사로 인한 아픔을 지금까지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받았다 할지라도 악한 영의 세계 곧 루시퍼와 원수 마귀 사단 등의 정체를 모르면 지배하고 다스릴 수 없으며 오히려 미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알고 또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알게 되면 큰 능력이 되므로 어두움의 세력에 미혹당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영의 세계에 대하여 깨달아 참 믿음으로 늘 승리하며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참자녀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을 위한 준비 단계로 우리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를 만들기에 앞서 영의 세계를 만드셨는데, 그 중 하나님을 도울 존재로서 각 분야를 담당하는 수많은 천사장들과 천사들 외에도 천사장과 같은 위치와 위엄을 가진 또 다른 천사들을 만드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보좌하며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한 권세를 주실 뿐 아니라 예외적으로 우리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인성을 주셨으므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고 자유의지 가운데 행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음악을 담당한 루시퍼 천사장이었습니다.
1. 천사들이 타락한 과정
본래 천사라는 존재는 하나님께 속하여 로보트와 같은 역할을 했기에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는 못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루시퍼에게 우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성을 주셔서 천사장과 같은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감미로운 말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즐겁고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무수히 흐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고 높은 권세를 누리다 보니 자유의지 속에 점점 높아지기 원하는 교만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고자 하는 엄청난 교만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악한 영의 세계가 태동되는 시발점이 되어 천사들의 일부도 타락하게 되었는데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을까요?
루시퍼는 교만에 사로잡혀 하나님보다 높아지고자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한 일들을 꾸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가 지닌 권세와 위치가 대단했기에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천사들을 자기 편으로 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용들과 용들의 휘하에 있던 그의 사자들이었는데 용은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 있었던 그룹들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주인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애완 동물과 같아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나게 하는 장식과 같은 존재로서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으며 힘이 있고 권세가 있어 담대하였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지극히 받았던 존재였습니다.
루시퍼가 인성이 있음으로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기쁨과 행복을 드리는 존재였다면 용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귀여움과 사랑을 받는 존재로 큰 권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시퍼는 하나님에 관해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도 용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용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교묘한 계략과 말로써 미혹했습니다.
루시퍼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던 용이 쉽게 자신의 꼬임에 넘어올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지금은 마치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장차는 우리 모두가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미혹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루시퍼는 자신의 지휘 아래 있던 천사들과 용을 반란에 끌어들임으로 그의 사자들까지 자기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천사들이 루시퍼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로보트와 같은 존재였고 오직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천사들이었으니 자신의 직속 상관인 용과 루시퍼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주도하는 장군 휘하에 있는 병사들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쿠데타에 가담하여 반란군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2. 하늘에서 쫓겨나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한 루시퍼는 결국 하나님께 패하여 자신의 무리들과 함께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겔 28:16). 그러므로 이사야 14:12-15을 보면 루시퍼에 대하여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다서 1:6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했고, 베드로후서 2:4에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했으니 루시퍼를 따랐던 무리들 또한 하늘에서 쫓겨나 어둡고 깊은 무저갱 속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인간경작을 위하여 루시퍼에게 권세를 주시고 악한 영들의 세계를 지배하에 다스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루시퍼와 용 그의 사자들과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가 무저갱에서 풀려나 공중 권세를 잡게 되었습니다(계 12:7-10).
그러므로 루시퍼는 오늘날도 공중에서 용과 함께 지금 악의 영들의 우두머리로서 수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지시하고 조종하며, 어떻게든지 성도들을 미혹하여 사망으로 이끌어 가고자 힘쓰고 있습니다(벧전 5:8).
3. 악한 영의 세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루시퍼와 그의 천사들, 그리고 용과 그의 사자들이 타락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우리가 인간경작을 통해 선과 사랑과 의를 이루어 하나님께 속한 영의 사람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진리와 반대되는 비진리를 체험하고 이를 통해 참된 진리를 깨우쳐야 합니다. 선과 반대되는 악도 알고 사랑과 반대되는 미움도 배신도 알며, 의와 반대되는 불의도 겪어 봄으로 인해 진리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고 중심에서 깨달아야 변치 않는 참믿음을 가진 자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을 위하여 비진리를 주관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함을 아시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에게 어두움의 권세를 주신 것이지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루시퍼의 존재는 마치 농작물을 가꿀 때 필요한 비료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비료는 몸에 해로운 독성 물질이 들어 있어서 사람이 직접 먹으면 죽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것을 농작물에 뿌려 주면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루시퍼는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단번에 멸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께서는 알곡된 참자녀를 얻기 위해 루시퍼의 배신과 그의 교만, 그리고 그 휘하에 있는 악한 영들의 역사로 인한 아픔을 지금까지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받았다 할지라도 악한 영의 세계 곧 루시퍼와 원수 마귀 사단 등의 정체를 모르면 지배하고 다스릴 수 없으며 오히려 미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알고 또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알게 되면 큰 능력이 되므로 어두움의 세력에 미혹당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영의 세계에 대하여 깨달아 참 믿음으로 늘 승리하며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참자녀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성경에는 천사에 대한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고, 또 제 주변에는 실제로 천사를 보았거나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 천사를 본 적이 없는데 천사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천사의 역할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 피조물에 따라 크게 나누어 우리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 곧 사람을 비롯한 온 우주 만물이 있는가 하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영의 세계에 속한 피조물 중의 하나인 천사는 초월적이고도 신비로운 존재로서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오늘날 문학과 영화, 연극, 그리고 음악에서도 자주 출현하는 주제가 되었는데 이러한 천사의 실제적 존재와 활동에 대하여는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성경에 충분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천사는 어떠한 존재일까요?
1. 천사의 존재와 속성
성경 66권 중 34권이 천사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으며, 천사란 단어가 약 275회 등장함은 물론 예수님께서 천사의 존재를 알고 가르치셨다는 점에서(마 18:10, 26:53) 천사가 확실히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6절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영안이 열리니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 주시면 천사뿐만 아니라 더 깊은 영의 세계까지도 능히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천사는 어떠한 존재일까요?
인간과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람의 형상과 비슷하지만 살과 뼈가 없는 순수한 영적 존재이므로(시 148:2, 5 ; 골 1:16 ; 히 1:14) 결혼이나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마 22:30 ; 눅 20:36). 뿐만 아니라 인간과 같이 지성(벧전 1:12)과 함께 기쁨과 분노, 또는 온유와 같은 감정(눅 2:13)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같이 무한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나 사람보다는 월등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마 24:36 ; 벧후 2:11).
2. 천사의 조직과 사역
성경을 보면 '천만의 천사들'(히 12:22)이라 하여 무수한 천사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천사(天使)와 천군(天軍)(시 68:17), 천사장(天使長)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살전 4:16 ; 유 1:9). 곧 하나님께서는 천사들 사이에 질서와 계급을 세우시고 담당하는 분야도 분할하여 주셨으며 맡은 사역에 따라 그 위엄을 달리하셨던 것입니다(엡 1:21, 3:10 ; 골 1:16, 2:10 ; 벧전 3:22).
마치 국가에 법무, 국방, 행정, 건설,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부처가 있고, 각각의 부처를 담당하는 장관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영의 세계에도 여러 가지 분야를 두시고 각 분야를 담당하는 가장 머리되는 천사로서 천사장을 두셨던 것입니다. 또한 천사장 밑에 여러 머리급 천사들을 두어 천사장을 돕게 하셨고, 이 머리급 천사들이 천사장 휘하의 천사들을 나누어 지휘할 수 있도록 천사들 사이에도 급을 두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천사들은 과연 어떠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일까요?
전반적으로 천사의 사역은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고 시중드는 일 외에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진행과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며 돕는 것입니다.
먼저 천사장들은 하나님 곁에서 손과 발과 눈과 귀가 되어 모든 분야를 두루 살피고 중요한 사항들을 보고 드리며 하나님께 직접 지시를 받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가브리엘과 미가엘을 들 수 있는데 가브리엘이 문관(文官)에 해당된다면 미가엘은 무관(武官)에 해당되며,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경작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돕는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합니다.
성경을 보면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큰 응답이나 섭리와 계획, 그리고 계시의 은밀한 것을 풀 때에 그 응답을 가지고 내려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단 9:21-23 ; 눅 1:19 ; 눅 1:26-27). 반면에 미가엘은 하늘의 군대장관으로서 악한 영들을 대적하는 싸움을 지휘하며 때로는 직접 나서서 어두움의 진을 깨뜨립니다(단 10:13-14, 10:21 ; 유 1:9 ; 계12:7-8).
또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천사가 하나 이상 딸려 있어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고 보호해 주며(히 1:14), 하나님을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가 하나님께 보고하는 천사들이 있으며(마 18:10), 수종드는 천사도 있어 예수님께서 마귀의 세 차례 시험을 물리치신 후에 수종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 4:11).
그런가 하면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 나타나 굶주린 사자들의 입을 봉하고,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옥문을 열고 그를 구해 냈던 경우처럼 힘을 사용하는 천사들도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와 천군이 있지요(시 148:2). 그리고 수많은 불말과 불병거를 거느리는 군대가 있어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기도 합니다(왕하 6:17). 이 모든 것은 오늘날도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얼마든지 우리 가운데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기도할 때 그 향을 받아 가는 천사들이 있으며(계 8:3-5) 임박한 심판을 알리기도 하고(창 19:13 ; 계 14:6), 범죄에 대한 보응으로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있고(삼하 24:16 ; 행 12:23), 세상의 마지막 심판 때에는 알곡신자를 거두는 추수꾼으로 일하게 되는 등(마 13:39) 실로 성경에 기록된 천사의 사역들은 매우 다양하여 분야 분야에서 활동하는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천군 천사의 수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성경에 나오는 가브리엘, 미가엘 천사장 외에도 많은 천사장들이 있어 천군과 천사를 지도하고 치리하며 가르쳐 인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우리를 섬기고 돕는 자로서 성령의 지도 아래 분주하게 우리 주위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동안 보이지 않게 우리를 도왔던 모든 천사들을 기쁘게 만나 보게 될 것이며, 천사들의 아름답고 웅장한 찬송 소리를 들으며 함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전서 2장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의 세계는 무한하여 사람의 유한한 지식과 이론으로는 알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히 깨우침을 구하는 자가 되어 영의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뜻을 깨우침으로 주 안에서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사는 어떠한 존재일까요?
1. 천사의 존재와 속성
성경 66권 중 34권이 천사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으며, 천사란 단어가 약 275회 등장함은 물론 예수님께서 천사의 존재를 알고 가르치셨다는 점에서(마 18:10, 26:53) 천사가 확실히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6절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영안이 열리니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 주시면 천사뿐만 아니라 더 깊은 영의 세계까지도 능히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천사는 어떠한 존재일까요?
인간과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람의 형상과 비슷하지만 살과 뼈가 없는 순수한 영적 존재이므로(시 148:2, 5 ; 골 1:16 ; 히 1:14) 결혼이나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마 22:30 ; 눅 20:36). 뿐만 아니라 인간과 같이 지성(벧전 1:12)과 함께 기쁨과 분노, 또는 온유와 같은 감정(눅 2:13)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같이 무한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나 사람보다는 월등한 지식과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마 24:36 ; 벧후 2:11).
2. 천사의 조직과 사역
성경을 보면 '천만의 천사들'(히 12:22)이라 하여 무수한 천사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천사(天使)와 천군(天軍)(시 68:17), 천사장(天使長)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살전 4:16 ; 유 1:9). 곧 하나님께서는 천사들 사이에 질서와 계급을 세우시고 담당하는 분야도 분할하여 주셨으며 맡은 사역에 따라 그 위엄을 달리하셨던 것입니다(엡 1:21, 3:10 ; 골 1:16, 2:10 ; 벧전 3:22).
마치 국가에 법무, 국방, 행정, 건설,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부처가 있고, 각각의 부처를 담당하는 장관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영의 세계에도 여러 가지 분야를 두시고 각 분야를 담당하는 가장 머리되는 천사로서 천사장을 두셨던 것입니다. 또한 천사장 밑에 여러 머리급 천사들을 두어 천사장을 돕게 하셨고, 이 머리급 천사들이 천사장 휘하의 천사들을 나누어 지휘할 수 있도록 천사들 사이에도 급을 두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천사들은 과연 어떠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일까요?
전반적으로 천사의 사역은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고 시중드는 일 외에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진행과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며 돕는 것입니다.
먼저 천사장들은 하나님 곁에서 손과 발과 눈과 귀가 되어 모든 분야를 두루 살피고 중요한 사항들을 보고 드리며 하나님께 직접 지시를 받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가브리엘과 미가엘을 들 수 있는데 가브리엘이 문관(文官)에 해당된다면 미가엘은 무관(武官)에 해당되며,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경작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돕는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합니다.
성경을 보면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큰 응답이나 섭리와 계획, 그리고 계시의 은밀한 것을 풀 때에 그 응답을 가지고 내려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단 9:21-23 ; 눅 1:19 ; 눅 1:26-27). 반면에 미가엘은 하늘의 군대장관으로서 악한 영들을 대적하는 싸움을 지휘하며 때로는 직접 나서서 어두움의 진을 깨뜨립니다(단 10:13-14, 10:21 ; 유 1:9 ; 계12:7-8).
또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천사가 하나 이상 딸려 있어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고 보호해 주며(히 1:14), 하나님을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가 하나님께 보고하는 천사들이 있으며(마 18:10), 수종드는 천사도 있어 예수님께서 마귀의 세 차례 시험을 물리치신 후에 수종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 4:11).
그런가 하면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 나타나 굶주린 사자들의 입을 봉하고,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옥문을 열고 그를 구해 냈던 경우처럼 힘을 사용하는 천사들도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와 천군이 있지요(시 148:2). 그리고 수많은 불말과 불병거를 거느리는 군대가 있어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기도 합니다(왕하 6:17). 이 모든 것은 오늘날도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얼마든지 우리 가운데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기도할 때 그 향을 받아 가는 천사들이 있으며(계 8:3-5) 임박한 심판을 알리기도 하고(창 19:13 ; 계 14:6), 범죄에 대한 보응으로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있고(삼하 24:16 ; 행 12:23), 세상의 마지막 심판 때에는 알곡신자를 거두는 추수꾼으로 일하게 되는 등(마 13:39) 실로 성경에 기록된 천사의 사역들은 매우 다양하여 분야 분야에서 활동하는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천군 천사의 수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성경에 나오는 가브리엘, 미가엘 천사장 외에도 많은 천사장들이 있어 천군과 천사를 지도하고 치리하며 가르쳐 인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우리를 섬기고 돕는 자로서 성령의 지도 아래 분주하게 우리 주위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동안 보이지 않게 우리를 도왔던 모든 천사들을 기쁘게 만나 보게 될 것이며, 천사들의 아름답고 웅장한 찬송 소리를 들으며 함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전서 2장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의 세계는 무한하여 사람의 유한한 지식과 이론으로는 알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히 깨우침을 구하는 자가 되어 영의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뜻을 깨우침으로 주 안에서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는 치료의 역사가 놀랍습니다. 각색 질병은 물론, 귀머거리나 소경, 앉은뱅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즉시 치료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치료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지요?
마태복음 4장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 하여 하나님께서는 '병'과 '약한 것'을 구별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감기, 몸살과 같은 가벼운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 앉은뱅이, 소아마비 등 신체의 어떤 기관이 잘못되어서 그 기능이 마비되거나 퇴화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신체 이상 증세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능력이나 방법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경우를 뜻합니다. 대부분 부모나 자신의 실수 또는 사고로 인하여 생기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말미암은 것도 있습니다(요 9:1-3).
1. 모든 병과 약한 것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권능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데, 이러한 성령이 불같이 임하면 질병을 유발시키는 세균을 태우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불을 받고 치료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데 아주 중한 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은 사람을 통하여 믿음대로 치료되지요.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4장 12절에는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참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는 물론, 오늘날도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각색 질병은 물론, 귀신들린 자,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이나 불치병, 소경이나 귀머거리도 치료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교회뿐 아니라 제가 인도하는 각종 집회를 통해서도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시며 무수한 사람들이 치료의 역사를 체험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직접 손을 얹어 안수기도할 때 치료받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안수할 수 없으므로 단에서 전체적으로 기도해도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으며 음성전화사서함 기도나 손수건, 사진, 무안단물 등을 통해서도 놀라운 역사들을 체험하고 있지요.
오늘날 자외선 치료가 개발되어 치료에 활용되는 것처럼 치료받은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붉은색의 빛을 보았는데 치료되었다고도 하고 푸른색의 빛을 보았는데 치료받았다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의 권능은 붉은색, 푸른색 외에도 흰색과 황금색의 빛으로 치료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는데 각기 치료의 영역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각색 질병은 붉은색의 빛인 성령의 불로 치료되지만 귀신들린 자, 사단의 역사를 받는 사람 등 어둠의 세력에 의한 것이나 자폐증, 정신적인 질병에 속한 경우는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푸른 색의 빛이어야 치료되며, 소경이 눈뜨고 귀머거리가 치료되고 벙어리가 말하는 등 모든 약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흰색의 빛이어야 치료된다는 사실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말씀하셨으니 누구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면 구약시대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권능의 빛으로 각색 질병은 물론, 모든 약한 것도 치료받게 됩니다.
2.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치료 사례 및 방법
1)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료하신 하나님의 권능
마가복음 7장 31-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료하신 내용이 나오는데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이처럼 행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귀머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예수님께서 손가락을 귀에 넣어 감촉을 느끼게 하시고, 그로 인해 치료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갖도록 도와 주신 것이요, 또한 '침을 뱉았다'는 것은 그가 귀신의 작용에 의해서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며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자 침을 뱉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심령이 되어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때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 소경을 치료하신 하나님의 권능
마가복음 8장 22-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소경을 치료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의 경우는 한 번의 안수로 완치되지 못하고 두 번째 안수받은 후에야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능력으로는 단번에 완전히 치료하실 수 있지만 소경의 믿음이 적으므로 다시 안수하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와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믿음은 치료받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에 치료가 안 되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두 번, 세 번 기도해 주어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권능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는 곧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서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행 3:6-10).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뛸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일을 본 무리가 놀라며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행 14:8-12).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말씀과 기도로 온전히 성결되고 영적인 사랑이 임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바로 이러한 권능이 임한 사람에게 의뢰하여 믿음으로 기도를 받으면 의학적으로 고칠 수 없는 약한 자라 할지라도 즉시 온전히 치료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는 자가 되어 모든 건강의 문제를 해결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감기, 몸살과 같은 가벼운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 앉은뱅이, 소아마비 등 신체의 어떤 기관이 잘못되어서 그 기능이 마비되거나 퇴화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신체 이상 증세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능력이나 방법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경우를 뜻합니다. 대부분 부모나 자신의 실수 또는 사고로 인하여 생기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말미암은 것도 있습니다(요 9:1-3).
1. 모든 병과 약한 것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권능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데, 이러한 성령이 불같이 임하면 질병을 유발시키는 세균을 태우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불을 받고 치료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데 아주 중한 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은 사람을 통하여 믿음대로 치료되지요.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4장 12절에는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참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는 물론, 오늘날도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각색 질병은 물론, 귀신들린 자,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이나 불치병, 소경이나 귀머거리도 치료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교회뿐 아니라 제가 인도하는 각종 집회를 통해서도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시며 무수한 사람들이 치료의 역사를 체험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직접 손을 얹어 안수기도할 때 치료받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안수할 수 없으므로 단에서 전체적으로 기도해도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으며 음성전화사서함 기도나 손수건, 사진, 무안단물 등을 통해서도 놀라운 역사들을 체험하고 있지요.
오늘날 자외선 치료가 개발되어 치료에 활용되는 것처럼 치료받은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붉은색의 빛을 보았는데 치료되었다고도 하고 푸른색의 빛을 보았는데 치료받았다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의 권능은 붉은색, 푸른색 외에도 흰색과 황금색의 빛으로 치료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는데 각기 치료의 영역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각색 질병은 붉은색의 빛인 성령의 불로 치료되지만 귀신들린 자, 사단의 역사를 받는 사람 등 어둠의 세력에 의한 것이나 자폐증, 정신적인 질병에 속한 경우는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푸른 색의 빛이어야 치료되며, 소경이 눈뜨고 귀머거리가 치료되고 벙어리가 말하는 등 모든 약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흰색의 빛이어야 치료된다는 사실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말씀하셨으니 누구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면 구약시대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권능의 빛으로 각색 질병은 물론, 모든 약한 것도 치료받게 됩니다.
2.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치료 사례 및 방법
1)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료하신 하나님의 권능
마가복음 7장 31-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료하신 내용이 나오는데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이처럼 행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귀머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예수님께서 손가락을 귀에 넣어 감촉을 느끼게 하시고, 그로 인해 치료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갖도록 도와 주신 것이요, 또한 '침을 뱉았다'는 것은 그가 귀신의 작용에 의해서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며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자 침을 뱉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심령이 되어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때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 소경을 치료하신 하나님의 권능
마가복음 8장 22-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소경을 치료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의 경우는 한 번의 안수로 완치되지 못하고 두 번째 안수받은 후에야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능력으로는 단번에 완전히 치료하실 수 있지만 소경의 믿음이 적으므로 다시 안수하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와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믿음은 치료받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에 치료가 안 되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두 번, 세 번 기도해 주어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권능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는 곧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서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행 3:6-10).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뛸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일을 본 무리가 놀라며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행 14:8-12).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말씀과 기도로 온전히 성결되고 영적인 사랑이 임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바로 이러한 권능이 임한 사람에게 의뢰하여 믿음으로 기도를 받으면 의학적으로 고칠 수 없는 약한 자라 할지라도 즉시 온전히 치료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는 자가 되어 모든 건강의 문제를 해결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저는 얼마 전 친척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는데, 불현듯 한평생 수고하며 살다가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특별한 목적과 섭리 가운데 우주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을 보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지으신 데는 더욱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 그 뜻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셨습니다(창 1:27-28).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에 대하여는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이 되었던 것입니다(창 2:7). 여기서 생기란, 하나님의 기로서 힘, 능력, 에너지, 영(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여러분의 가정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면 어떻습니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이 스위치만 연결하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사람이 나와 노래도 하고 대화도 하는 모습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화면을 띄우기까지 외관상으로는 스위치만 움직이는 것 같지만 텔레비전 뒷면을 열어 보면 오밀조밀한 부속품들이 매우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부속품들을 만들어 조립한 후 전류를 통하게 하면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우리 사람을 단지 형상만 빚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오장육부와 뼈도 만들어 놓으시고, 피가 통할 수 있는 핏줄과 또한 기능을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는 신경조직도 다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치 기계에 전류를 흐르게 하듯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는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지요.
피조물인 사람도 오늘날엔 지능이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내고 있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만들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2.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성(神性)을 갖고 계시기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온 우주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더불어 인성(人性)을 지니셨기에 희로애락을 느끼시며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특별히 우리 사람을 창조하시되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자녀를 얻으시기 위해 이 땅 위에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변에는 천사와 같은 많은 영적인 존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사랑을 주고 받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성(人性), 즉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었습니다. 단지 로봇과 같이 시키는 대로 순종만 할 뿐 희로애락을 느낄 수도 없고 사랑을 주고 받을 수도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 생각해 볼 때, 가령 아주 예쁘게 만들어진 인형이 있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할지라도 그 인형이 내가 낳은 자녀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차라리 말썽꾸러기라 해도 부모를 알아보고 사랑도 표현할 줄 아는 자녀가 훨씬 사랑스럽듯이 하나님 편에서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원하셨기에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을 보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창조주이시며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까지 보내사 온 인류의 죄값을 담당할 화목제물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름다운 천국을 예비해 놓으시고 그 곳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처음부터 이처럼 온갖 수고와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 가운데 자신의 형상을 그대로 닮은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를 위해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창설하여 그 곳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도록 배려해 주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결국엔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죄인이 되어 영원한 사망인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곧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인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 이를 믿는 사람마다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5장 12절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창조의 섭리를 깨달아 헛되고 무익한 삶 가운데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사람의 본분을 되찾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을 보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지으신 데는 더욱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 그 뜻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셨습니다(창 1:27-28).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에 대하여는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이 되었던 것입니다(창 2:7). 여기서 생기란, 하나님의 기로서 힘, 능력, 에너지, 영(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여러분의 가정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면 어떻습니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이 스위치만 연결하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사람이 나와 노래도 하고 대화도 하는 모습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화면을 띄우기까지 외관상으로는 스위치만 움직이는 것 같지만 텔레비전 뒷면을 열어 보면 오밀조밀한 부속품들이 매우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부속품들을 만들어 조립한 후 전류를 통하게 하면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우리 사람을 단지 형상만 빚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오장육부와 뼈도 만들어 놓으시고, 피가 통할 수 있는 핏줄과 또한 기능을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는 신경조직도 다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치 기계에 전류를 흐르게 하듯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는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지요.
피조물인 사람도 오늘날엔 지능이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내고 있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만들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2.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성(神性)을 갖고 계시기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온 우주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더불어 인성(人性)을 지니셨기에 희로애락을 느끼시며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특별히 우리 사람을 창조하시되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자녀를 얻으시기 위해 이 땅 위에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변에는 천사와 같은 많은 영적인 존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사랑을 주고 받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성(人性), 즉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었습니다. 단지 로봇과 같이 시키는 대로 순종만 할 뿐 희로애락을 느낄 수도 없고 사랑을 주고 받을 수도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 생각해 볼 때, 가령 아주 예쁘게 만들어진 인형이 있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할지라도 그 인형이 내가 낳은 자녀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차라리 말썽꾸러기라 해도 부모를 알아보고 사랑도 표현할 줄 아는 자녀가 훨씬 사랑스럽듯이 하나님 편에서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원하셨기에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을 보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창조주이시며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까지 보내사 온 인류의 죄값을 담당할 화목제물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름다운 천국을 예비해 놓으시고 그 곳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처음부터 이처럼 온갖 수고와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 가운데 자신의 형상을 그대로 닮은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를 위해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창설하여 그 곳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도록 배려해 주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결국엔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죄인이 되어 영원한 사망인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곧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인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 이를 믿는 사람마다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5장 12절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창조의 섭리를 깨달아 헛되고 무익한 삶 가운데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사람의 본분을 되찾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교회에 출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잘못이라도 용서하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장차 믿음의 사람들이 가게 되는 천국을 두신 반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가야 하는 지옥도 만드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아름다운 천국만 두시지 않고 무서운 형벌이 따르는 지옥까지 두시고 심판하시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의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인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인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다가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 되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를 믿고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도를 믿어 천국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전도해도 믿지 않고 여전히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천국 외에도 영원한 형벌이 있는 지옥을 만드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인간을 경작하여 알곡과 쭉정이로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알곡을 거두기 위해 경작하듯 하나님께서도 참된 자녀를 얻으시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 땅에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즉 사람의 본분을 지켜 행함으로 잃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되찾은 자녀들이 알곡이라면, 세상을 사랑하며 악을 좇아 사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고 말씀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쭉정이에 속합니다.
농부가 추수 때에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거름으로 쓰거나 불에 태워 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심판 때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알곡은 모아 천국에 들이시고 그렇지 않은 쭉정이는 모아 지옥불에 던지시는 것입니다(마 3:12).
천국은 슬픔, 질병, 고통이 없이 영원한 행복만 있는 곳인 반면, 지옥은 불못과 유황못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혹자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그처럼 고통이 따르는 지옥을 두셨나요? 쭉정이도 천국에 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며, 천국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흠도 없이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마 7:21).
만일 선과 사랑만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모인 천국에 온갖 악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함께한다면 심히 불편할 수밖에 없고 아름다운 천국이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따로 지옥을 두실 수밖에 없으며 이것도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며(출 3:14),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 되실 뿐만 아니라(계 22:13) 영원 전부터 계시고 영원 후까지 계시는 불멸의 존재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신 사람의 영혼 또한 영원 불멸하기에 영혼의 장막과 같은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 해도 불멸의 영혼이 거할 곳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알곡을 모아들이는 천국과 구별된 지옥을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2.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며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지만 모든 것을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8절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심으면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하여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되므로 영혼이 잘 되고, 충성 봉사를 심으면 영육간에 강건함을 입으며, 십일조와 감사예물 등 물질로 심으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더 많이 축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으로 심으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보응을 받게 되며, 설령 믿음 안에 들어왔을지라도 죄와 불법을 심으면 반드시 연단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으며, 마태복음 16장 27절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하셨고, 또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3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각 사람의 행위대로 그에 맞는 상급과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심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국적으로 각 사람이 가게 될 두 갈래의 길 곧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의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 편에서 선택하는 것이요, 행한 대로 거둘 뿐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므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험한 산길을 헤매이는 목자의 마음처럼(눅 15:4-7), 하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2-13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 1장 18절을 보면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은 조금도 없는 빛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죄를 너무나 싫어하시지만, 어떠한 죄인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돌이켜 회개하면 그 죄를 기억지도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한없는 용서와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 주시며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그 뜻대로 행함으로 영원한 천국을 얻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 되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를 믿고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도를 믿어 천국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전도해도 믿지 않고 여전히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천국 외에도 영원한 형벌이 있는 지옥을 만드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인간을 경작하여 알곡과 쭉정이로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알곡을 거두기 위해 경작하듯 하나님께서도 참된 자녀를 얻으시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 땅에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즉 사람의 본분을 지켜 행함으로 잃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되찾은 자녀들이 알곡이라면, 세상을 사랑하며 악을 좇아 사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고 말씀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쭉정이에 속합니다.
농부가 추수 때에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거름으로 쓰거나 불에 태워 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심판 때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알곡은 모아 천국에 들이시고 그렇지 않은 쭉정이는 모아 지옥불에 던지시는 것입니다(마 3:12).
천국은 슬픔, 질병, 고통이 없이 영원한 행복만 있는 곳인 반면, 지옥은 불못과 유황못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혹자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그처럼 고통이 따르는 지옥을 두셨나요? 쭉정이도 천국에 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며, 천국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흠도 없이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마 7:21).
만일 선과 사랑만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모인 천국에 온갖 악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함께한다면 심히 불편할 수밖에 없고 아름다운 천국이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따로 지옥을 두실 수밖에 없으며 이것도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며(출 3:14),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 되실 뿐만 아니라(계 22:13) 영원 전부터 계시고 영원 후까지 계시는 불멸의 존재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신 사람의 영혼 또한 영원 불멸하기에 영혼의 장막과 같은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 해도 불멸의 영혼이 거할 곳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알곡을 모아들이는 천국과 구별된 지옥을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2.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며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지만 모든 것을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8절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심으면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하여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되므로 영혼이 잘 되고, 충성 봉사를 심으면 영육간에 강건함을 입으며, 십일조와 감사예물 등 물질로 심으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더 많이 축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으로 심으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보응을 받게 되며, 설령 믿음 안에 들어왔을지라도 죄와 불법을 심으면 반드시 연단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으며, 마태복음 16장 27절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하셨고, 또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3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각 사람의 행위대로 그에 맞는 상급과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심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국적으로 각 사람이 가게 될 두 갈래의 길 곧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의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 편에서 선택하는 것이요, 행한 대로 거둘 뿐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므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험한 산길을 헤매이는 목자의 마음처럼(눅 15:4-7), 하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2-13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 1장 18절을 보면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은 조금도 없는 빛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죄를 너무나 싫어하시지만, 어떠한 죄인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돌이켜 회개하면 그 죄를 기억지도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한없는 용서와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 주시며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그 뜻대로 행함으로 영원한 천국을 얻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