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 912 PAGE : 1/32
2019-12-13
제50과여호와의 묵시와 정한 때
하박국 2:2~4
읽을말씀 : 하박국 2:2~4 | 외울말씀 : 아모스 3:7 l 참고 말씀: 마태복음 24장
교육목표 :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악에 물들지 않고 선을 행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이 되게 한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한 남유다 선지자입니다. 남유다는 요시야왕 시대가 끝나고 여호아하스왕을 거쳐 여호야김의 통치 시대로 오면서 불의와 유혈로 가득 찹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를 탄식하며 하나님께 아룁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
1. 하박국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묵시
하나님은 남유다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실상은 모든 것이 하나님 섭리와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국 유다의 죄악을 탄식하는 하박국을 하나님께서는 열국 가운데 일어나는 세계사의 현장을 바라보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는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앞으로 갈대아인을 일으킬 것을 알려 주십니다(합 1:5~11). 갈대아인이란 바벨론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 바벨론 사람들은 사나웠고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알려 주신 예언이 성취되어 주전 600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고, 주전 586년에는 급기야 유다를 멸망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하신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죄악과 강포가 하나님의 선민 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먼저 심판하지 않고 남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그들을 사용하시는지를 물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에게 묵시로 임하였는데 그 내용이 바로 본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악인은 반드시 멸망할 것과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는 분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것입니다(전 12:14).
믿음이 있으면 겸손히 회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38~40절에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말씀했지요. 또한 잠언 24장 16절에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2. 심판의 정한 때가 되면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며 심판에 이릅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우리는 심판의 정한 때가 오면 속히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하는 정도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알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그랬지요. 동틀 때부터 천사가 롯을 재촉하였습니다. 롯이 지체하자 천사들이 아예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냈습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고 말합니다. 하도 재촉하니 롯은 몸을 피할 만한 곳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소알’이라는 가까운 성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천사에게 청합니다. 결국 롯이 도망하여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고 하늘에서 곧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습니다.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 심판도 정한 때가 되자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대로 죄악 된 성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힘쓴 롯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지켜 주셨지요.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고, 심판의 때가 되면 지체치 않고 이뤄집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환난도 속히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정한 때가 있음을 미리 알려 주고 피할 수 있도록 사랑을 베푸십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의인 된 하나님의 자녀는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환난을 당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3.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오늘날은 악이 관영할 뿐만 아니라 악으로 물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마지막 때가 다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고, 14절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불법이 성하며 사랑이 식었습니까? 또한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지요.
다니엘 12장 4절에는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했습니다. 요즈음 국가 간에도 얼마나 빨리 왕래합니까? 지구촌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통신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세계는 일일 생활권이 되었습니다. 또 급격히 발달하는 지식과 정보로 과학 문명은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2~33절에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곧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라가 멸망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를 찾아 독립하는 것을 보거든 주님께서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셨으니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으니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때가 악하여 심판의 때가 지체치 않고 응할 것을 알아 세월을 아낌은 물론 어둠의 일 즉 비진리, 죄를 열심히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인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여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요(롬 13:11~14).
그렇지 않고 세상을 돌아본다면 롯의 아내처럼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피하여 소돔성에서 나온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하라”는 천사의 말을 따르지 않고 불과 유황이 쏟아지는 소돔을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결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묵시를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고 계십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했고, 히브리서 13장 8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며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써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구원은 물론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한 유다를 어느 나라를 통해 심판하셨을까요?
2. 무화과나무는 ( )을 상징하며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 )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주보 설교 요약과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바벨론’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은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까지 이기고 고대 근동의 확실한 주인이 된다.
그 해 남유다를 침략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것이 1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이어 B.C. 598년경 여호야긴왕과 에스겔과 기술자 등 1만여 명의 고급 인력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것이 2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바벨론은 B.C. 586년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비천한 자들 소수만 남겨 두고 모조리 잡아감으로 3차 바벨론 포로 정책을 실시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았던 무서운 바벨론이었지만 B.C. 539년경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여 가장 수명이 짧은 제국으로 기록되고 있다.
교육목표 :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악에 물들지 않고 선을 행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이 되게 한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을 전후하여 활동한 남유다 선지자입니다. 남유다는 요시야왕 시대가 끝나고 여호아하스왕을 거쳐 여호야김의 통치 시대로 오면서 불의와 유혈로 가득 찹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를 탄식하며 하나님께 아룁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
1. 하박국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묵시
하나님은 남유다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실상은 모든 것이 하나님 섭리와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국 유다의 죄악을 탄식하는 하박국을 하나님께서는 열국 가운데 일어나는 세계사의 현장을 바라보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는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앞으로 갈대아인을 일으킬 것을 알려 주십니다(합 1:5~11). 갈대아인이란 바벨론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 바벨론 사람들은 사나웠고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알려 주신 예언이 성취되어 주전 600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고, 주전 586년에는 급기야 유다를 멸망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하신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죄악과 강포가 하나님의 선민 유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먼저 심판하지 않고 남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그들을 사용하시는지를 물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에게 묵시로 임하였는데 그 내용이 바로 본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악인은 반드시 멸망할 것과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는 분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것입니다(전 12:14).
믿음이 있으면 겸손히 회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므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38~40절에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말씀했지요. 또한 잠언 24장 16절에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2. 심판의 정한 때가 되면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며 심판에 이릅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우리는 심판의 정한 때가 오면 속히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하는 정도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알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그랬지요. 동틀 때부터 천사가 롯을 재촉하였습니다. 롯이 지체하자 천사들이 아예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냈습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을 면하라고 말합니다. 하도 재촉하니 롯은 몸을 피할 만한 곳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소알’이라는 가까운 성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천사에게 청합니다. 결국 롯이 도망하여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고 하늘에서 곧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습니다.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 심판도 정한 때가 되자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대로 죄악 된 성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힘쓴 롯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지켜 주셨지요.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고, 심판의 때가 되면 지체치 않고 이뤄집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환난도 속히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정한 때가 있음을 미리 알려 주고 피할 수 있도록 사랑을 베푸십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의인 된 하나님의 자녀는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환난을 당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3.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오늘날은 악이 관영할 뿐만 아니라 악으로 물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마지막 때가 다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고, 14절에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불법이 성하며 사랑이 식었습니까? 또한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지요.
다니엘 12장 4절에는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했습니다. 요즈음 국가 간에도 얼마나 빨리 왕래합니까? 지구촌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통신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세계는 일일 생활권이 되었습니다. 또 급격히 발달하는 지식과 정보로 과학 문명은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2~33절에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곧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말합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라가 멸망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를 찾아 독립하는 것을 보거든 주님께서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셨으니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가 가까움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으니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때가 악하여 심판의 때가 지체치 않고 응할 것을 알아 세월을 아낌은 물론 어둠의 일 즉 비진리, 죄를 열심히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인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여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요(롬 13:11~14).
그렇지 않고 세상을 돌아본다면 롯의 아내처럼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피하여 소돔성에서 나온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하라”는 천사의 말을 따르지 않고 불과 유황이 쏟아지는 소돔을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결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묵시를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고 계십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했고, 히브리서 13장 8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며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써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구원은 물론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한 유다를 어느 나라를 통해 심판하셨을까요?
2. 무화과나무는 ( )을 상징하며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 )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주보 설교 요약과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 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바벨론’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바벨론은 B.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은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까지 이기고 고대 근동의 확실한 주인이 된다.
그 해 남유다를 침략하여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것이 1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이어 B.C. 598년경 여호야긴왕과 에스겔과 기술자 등 1만여 명의 고급 인력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것이 2차 바벨론 포로 정책이다.
바벨론은 B.C. 586년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비천한 자들 소수만 남겨 두고 모조리 잡아감으로 3차 바벨론 포로 정책을 실시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았던 무서운 바벨론이었지만 B.C. 539년경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여 가장 수명이 짧은 제국으로 기록되고 있다.
2019-12-06
제49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누가복음 8:43~48
읽을말씀 : 누가복음 8:43~48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6 l 참고 말씀/ 룻기 1장, 창세기 50장
교육목표 : 혈루증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 치료받은 것처럼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무엇이든지 응답받게 한다.
마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을 때 같이 동조하거나 악을 행치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아 경계하는 계기로 삼지요. 또한 선하고 좋은 소식을 들으면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귀감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은 이런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온 혈루증 여인
본문에 나오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어떠한 믿음을 지녔기에 치료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지요.
혈루증은 습관성 자궁 출혈로 계속하여 피가 나오는 병입니다. 그런 생활을 1, 2년도 아닌 열두 해나 계속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심신도 허약해졌겠습니까? 이 의원 저 의원을 찾아다니며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지만 돈만 허비하고 병은 더 중해졌습니다. 오랜 병으로 주위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세상을 원망하며 탄식과 고통 가운데 좌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끝까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에 희망이 샘솟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문둥병, 중풍 등 갖가지 병든 사람이 치료된다는 것입니다. 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케 되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으며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여인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여인은 중심이 선하기 때문에 소문을 있는 그대로 믿었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했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든 사람, 치료받고자 온 사람 등 어찌나 에워싼 무리가 많던지 예수님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은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저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으리라.’는 마음으로 애써 손을 뻗어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혈루 근원이 마르고 정상으로 회복되었지요. 여인은 마음이 선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을 믿고 그 앞에 나아왔고, 옷자락만 만지고도 나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살아온 여인은 믿음으로 새 삶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2. 의인은 어떠한 중심으로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의인은 어떠한 중심을 가진 사람일까요? 바로 룻이나 요셉과 같은 마음입니다. 먼저 룻을 살펴보겠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기근이 든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후 두 아들 역시 죽고 말지요.
나오미는 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데리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다가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홀로 된 며느리들이 불쌍하여 새 출발하라 한 것이지요. 이에 큰며느리 오르바는 울면서 나오미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죽는 일 외에는 결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 고백하고 홀로 된 시어머니를 끝까지 붙좇으며 봉양하였습니다. 이처럼 변함없이 자녀 된 도리를 다한 룻은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룻에게서 무엇을 깨우칠 수 있을까요?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도리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은 중심이 의롭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그러한 중심을 기뻐하여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유익을 좇지 않고 큰 손해를 본다 해도 선한 길을 택하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영광 돌려 나갑니다.
다음으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13년 만에 애굽 총리가 되었지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양식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 아버지와 형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이복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이 혹여 보복은 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예전에 그에게 행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은 용서를 구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이에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며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창 50:19~21).
만일 여러분이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요셉처럼 행할 수 있겠는지요? 요셉은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자신들이 악하니 요셉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판단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인과 악인의 마음씀이 다릅니다.
요셉의 형들이 선하고 의로웠다면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실수로 범죄했다 해도 겸허히 아우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의 대가를 달게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나를 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입니다.
3. 의인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가는가
의로운 마음과 중심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갈까요?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혈루증이 있으면 부정하게 여기고 접촉조차 피했지요(레 15:25). 따라서 여인은 누구 앞에 나서거나 감히 얼굴을 대하고 말하기조차 민망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참으로 존귀한 분이니 그분 앞에 서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분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여인처럼 자기를 낮추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무엇이든 응답을 받습니다. 배움이 부족하다든가 가난하다, 못났다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로 하나님 앞에 구하기도 민망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다 내려놓고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구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진정 마음을 담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아시고 기뻐 받으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 중심이 중요하지, 부족해서 혹은 나약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그 자체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가 치료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런 믿음을 소유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축복받을 만한 중심만 되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있든지 찾아내어 축복해 주시지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동 다윗을 찾아내어 왕으로 삼으셨고, 보잘것없고 아무 희망이 없는 룻이었지만 그 중심이 선하고 의로우니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복을 주셨습니다. 또 에스더처럼 피지배국의 사람이라 해도 일국의 왕후로 만들어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며 의로운 사람에게 넘치는 축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응답받을 수 있는 중심, 선하고 겸비한 중심을 이루어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 )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 )이 있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받을 수 있었다.
2. 우리가 룻에게서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 )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1~20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룻의 선’
①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음은 물론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를 좇는 길을 선택했다.
② 억지로 도리를 좇은 것이 아니라 성실과 진심으로 변함없이 행했다.
* 훗날 그의 자손을 통해 다윗과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복을 받았고, 천국에서도 존귀한 여인으로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렀다.
교육목표 : 혈루증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 치료받은 것처럼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무엇이든지 응답받게 한다.
마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을 때 같이 동조하거나 악을 행치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아 경계하는 계기로 삼지요. 또한 선하고 좋은 소식을 들으면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귀감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은 이런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온 혈루증 여인
본문에 나오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어떠한 믿음을 지녔기에 치료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지요.
혈루증은 습관성 자궁 출혈로 계속하여 피가 나오는 병입니다. 그런 생활을 1, 2년도 아닌 열두 해나 계속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심신도 허약해졌겠습니까? 이 의원 저 의원을 찾아다니며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지만 돈만 허비하고 병은 더 중해졌습니다. 오랜 병으로 주위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세상을 원망하며 탄식과 고통 가운데 좌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끝까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에 희망이 샘솟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문둥병, 중풍 등 갖가지 병든 사람이 치료된다는 것입니다. 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케 되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으며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여인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여인은 중심이 선하기 때문에 소문을 있는 그대로 믿었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했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든 사람, 치료받고자 온 사람 등 어찌나 에워싼 무리가 많던지 예수님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은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저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으리라.’는 마음으로 애써 손을 뻗어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혈루 근원이 마르고 정상으로 회복되었지요. 여인은 마음이 선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을 믿고 그 앞에 나아왔고, 옷자락만 만지고도 나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살아온 여인은 믿음으로 새 삶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2. 의인은 어떠한 중심으로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의인은 어떠한 중심을 가진 사람일까요? 바로 룻이나 요셉과 같은 마음입니다. 먼저 룻을 살펴보겠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기근이 든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후 두 아들 역시 죽고 말지요.
나오미는 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데리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다가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홀로 된 며느리들이 불쌍하여 새 출발하라 한 것이지요. 이에 큰며느리 오르바는 울면서 나오미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죽는 일 외에는 결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 고백하고 홀로 된 시어머니를 끝까지 붙좇으며 봉양하였습니다. 이처럼 변함없이 자녀 된 도리를 다한 룻은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룻에게서 무엇을 깨우칠 수 있을까요?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도리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은 중심이 의롭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그러한 중심을 기뻐하여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유익을 좇지 않고 큰 손해를 본다 해도 선한 길을 택하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영광 돌려 나갑니다.
다음으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13년 만에 애굽 총리가 되었지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양식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 아버지와 형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이복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이 혹여 보복은 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예전에 그에게 행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은 용서를 구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이에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며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창 50:19~21).
만일 여러분이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요셉처럼 행할 수 있겠는지요? 요셉은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자신들이 악하니 요셉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판단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인과 악인의 마음씀이 다릅니다.
요셉의 형들이 선하고 의로웠다면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실수로 범죄했다 해도 겸허히 아우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의 대가를 달게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나를 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입니다.
3. 의인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가는가
의로운 마음과 중심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갈까요?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혈루증이 있으면 부정하게 여기고 접촉조차 피했지요(레 15:25). 따라서 여인은 누구 앞에 나서거나 감히 얼굴을 대하고 말하기조차 민망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참으로 존귀한 분이니 그분 앞에 서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분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여인처럼 자기를 낮추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무엇이든 응답을 받습니다. 배움이 부족하다든가 가난하다, 못났다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로 하나님 앞에 구하기도 민망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다 내려놓고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구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진정 마음을 담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아시고 기뻐 받으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 중심이 중요하지, 부족해서 혹은 나약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그 자체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가 치료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런 믿음을 소유하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축복받을 만한 중심만 되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있든지 찾아내어 축복해 주시지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동 다윗을 찾아내어 왕으로 삼으셨고, 보잘것없고 아무 희망이 없는 룻이었지만 그 중심이 선하고 의로우니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복을 주셨습니다. 또 에스더처럼 피지배국의 사람이라 해도 일국의 왕후로 만들어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며 의로운 사람에게 넘치는 축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응답받을 수 있는 중심, 선하고 겸비한 중심을 이루어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 )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 )이 있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받을 수 있었다.
2. 우리가 룻에게서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어떤 유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선한 ( )를 좇는 그 자체를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1~20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룻의 선’
①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음은 물론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를 좇는 길을 선택했다.
② 억지로 도리를 좇은 것이 아니라 성실과 진심으로 변함없이 행했다.
* 훗날 그의 자손을 통해 다윗과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복을 받았고, 천국에서도 존귀한 여인으로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렀다.
2019-11-29
제48과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후서 4:7~8
읽을말씀 : 디모데후서 4:7~8 | 외울말씀 : 디모데후서 4:7 ㅣ 참고 말씀: 히브리서 11:6
교육목표 : 믿음을 지킴으로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좇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한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고, 응답받아 축복된 삶을 영위하며 소망 가운데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아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불법을 행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지요.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 성령 받기 전과 후의 베드로의 믿음
베드로는 성령 받기 전에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실 때에 베드로는 당당히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믿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요.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니 결국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니 생명 다해 복음을 전파하였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지키는 수제자가 되었지요.
2. 믿음을 굳게 지킨 선진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고, 당대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의 제자로 수학하였습니다. 독실한 유대교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지요.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죽도록 충성하였으며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일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습니다.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담대히 고백하였지요(딤후 4:7~8).
그러면 다니엘은 어떠했을까요? 다니엘은 바사 제국 총리가 됐을 때 시기하는 무리의 궤계로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알고 그들은 왕으로 하여금 한 달 동안 왕 외에 사람이나 신 앞에 무엇을 구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던져 넣는 금령을 반포하게 하였지요. 이를 알면서도 다니엘은 습관을 좇아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하였고 결국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사자의 입을 봉함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천하에 나타냈습니다. 다니엘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앞일에 대해 밝히 알려 주시며 높여 주셨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로한 왕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에 던지려 할 때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다니엘 3장 17~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지요.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풀무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나왔습니다. 이같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와도 믿음을 굳게 지켰다는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과감히 비진리를 끊고,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설령 핍박을 받는다 해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지요. 만일 주를 위해 핍박을 받고 죽임 당한다면 천국에서 그 영광을 누릴 것이니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과 달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궤계를 꾸민 이세벨에게 매수당한 두 거짓 증인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모함으로 무죄한 나봇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지요. 믿음을 굳게 지킨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행치 않습니다. 어떤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지요.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시드기야와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들도 거짓 예언을 하며 믿음을 저버립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은 아람 나라에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남유다 여호사밧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선지자들에게 들어 보자고 제안하지요. 그래서 아합왕이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일제히 전쟁에서 승리를 예언합니다. 그중 시드기야는 철뿔까지 만들어 흔들며 승리를 장담하지요.
반면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며, 아합왕은 죽으리라고 예언합니다. 이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승리를 호언하지요. 아합은 미가야를 투옥시키고 여호사밧 연합군과 함께 아람과 전쟁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시드기야와 사백 인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아합왕이 맞아 전사하였고 개들이 그 피를 핥았지요. 믿음을 저버리고 거짓으로 예언한 선지자들의 말이 결코 맞을 리가 없음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 데마 역시 믿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 그는 바울의 1차 투옥 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재차 투옥되자 그를 버리고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렸지요. 바울과 함께 고난당하기보다 세상의 부와 명예가 더 좋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고 기록합니다(딤후 4:10).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을 진리로 잘 지켜야 합니다.
여호수아 당시 아간도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범죄했습니다. 여리고성 함락 후 아간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몰래 탐나는 물건을 감추어 둠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지요.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그 행한 일을 고하라고 하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수 7:21).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하였고, 범죄한 아간은 온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거나 자기 유익을 좇아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지요. 여러분은 믿음을 굳게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으로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투옥되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2.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죽을 뻔하며 고난을 받았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신약 시대 권능의 사도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79~19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데마’
데마는 사도 바울 일행과 함께 전도 여행에 동참한 사람이었다.
바울이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에서 멀리 떨어진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할 때 ‘데마’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 보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이 글을 기록할 때는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갇혀 있을 때였다. 그만큼 데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울의 곁을 지키며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훗날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배신하고 떠나갔다(딤후 4:10). 한때는 바울의 고난에 함께한 그였는데 세월이 지나고 바울이 다시 감옥에 갇히자 결국 변질되어 믿음을 잃고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교육목표 : 믿음을 지킴으로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좇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한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고, 응답받아 축복된 삶을 영위하며 소망 가운데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작아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불법을 행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지요.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 성령 받기 전과 후의 베드로의 믿음
베드로는 성령 받기 전에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실 때에 베드로는 당당히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믿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요.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니 결국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니 생명 다해 복음을 전파하였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지키는 수제자가 되었지요.
2. 믿음을 굳게 지킨 선진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고, 당대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의 제자로 수학하였습니다. 독실한 유대교도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지요.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죽도록 충성하였으며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일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습니다.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담대히 고백하였지요(딤후 4:7~8).
그러면 다니엘은 어떠했을까요? 다니엘은 바사 제국 총리가 됐을 때 시기하는 무리의 궤계로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알고 그들은 왕으로 하여금 한 달 동안 왕 외에 사람이나 신 앞에 무엇을 구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던져 넣는 금령을 반포하게 하였지요. 이를 알면서도 다니엘은 습관을 좇아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하였고 결국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사자의 입을 봉함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천하에 나타냈습니다. 다니엘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앞일에 대해 밝히 알려 주시며 높여 주셨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로한 왕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에 던지려 할 때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다니엘 3장 17~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지요.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풀무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나왔습니다. 이같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와도 믿음을 굳게 지켰다는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과감히 비진리를 끊고,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설령 핍박을 받는다 해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지요. 만일 주를 위해 핍박을 받고 죽임 당한다면 천국에서 그 영광을 누릴 것이니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과 달리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궤계를 꾸민 이세벨에게 매수당한 두 거짓 증인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모함으로 무죄한 나봇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지요. 믿음을 굳게 지킨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행치 않습니다. 어떤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지요.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시드기야와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들도 거짓 예언을 하며 믿음을 저버립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은 아람 나라에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남유다 여호사밧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선지자들에게 들어 보자고 제안하지요. 그래서 아합왕이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일제히 전쟁에서 승리를 예언합니다. 그중 시드기야는 철뿔까지 만들어 흔들며 승리를 장담하지요.
반면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며, 아합왕은 죽으리라고 예언합니다. 이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승리를 호언하지요. 아합은 미가야를 투옥시키고 여호사밧 연합군과 함께 아람과 전쟁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시드기야와 사백 인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아합왕이 맞아 전사하였고 개들이 그 피를 핥았지요. 믿음을 저버리고 거짓으로 예언한 선지자들의 말이 결코 맞을 리가 없음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 데마 역시 믿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 그는 바울의 1차 투옥 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재차 투옥되자 그를 버리고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렸지요. 바울과 함께 고난당하기보다 세상의 부와 명예가 더 좋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고 기록합니다(딤후 4:10).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을 진리로 잘 지켜야 합니다.
여호수아 당시 아간도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범죄했습니다. 여리고성 함락 후 아간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몰래 탐나는 물건을 감추어 둠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지요.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그 행한 일을 고하라고 하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수 7:21).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하였고, 범죄한 아간은 온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거나 자기 유익을 좇아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지요. 여러분은 믿음을 굳게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으로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투옥되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2.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죽을 뻔하며 고난을 받았지만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신약 시대 권능의 사도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79~19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데마’
데마는 사도 바울 일행과 함께 전도 여행에 동참한 사람이었다.
바울이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에서 멀리 떨어진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할 때 ‘데마’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 보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이 글을 기록할 때는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갇혀 있을 때였다. 그만큼 데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울의 곁을 지키며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훗날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배신하고 떠나갔다(딤후 4:10). 한때는 바울의 고난에 함께한 그였는데 세월이 지나고 바울이 다시 감옥에 갇히자 결국 변질되어 믿음을 잃고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2019-11-22
제47과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마가복음 2:1~5
읽을말씀 : 마가복음 2:1~5 | 외울말씀 : 출애굽기 15:26 l 참고 말씀: 마태복음 8:13
교육목표 : 하나님 앞에 진실한 행함으로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예로부터 존경받는 의인은 의로운 행함과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악인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요.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성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의인과 악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신명기 34장 8절 이하를 보면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맟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모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가 잘 나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했지요.
이와 반면 악인의 죽음은 어떠합니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무수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아돌프 히틀러는 전쟁이 불리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환호했겠습니까.
성경에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시돈 왕의 딸 이세벨입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에게로 시집온 그녀는 왕과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물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며 온갖 악을 행했습니다. 한 번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고민할 때에 거짓 증인을 세우고 성의 유력한 사람을 매수하여 무죄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악행을 거듭한 이세벨은 신하들의 손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시체를 개들이 먹으므로 장사조차 지낼 수 없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지요. 이처럼 악인에게 힘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듯하지만 결국 힘이 사라지면 모두가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립니다.
2. 진실한 행함으로 믿음의 받침대를 세운 중풍병자와 친구들
본문에 보면 가버나움에 살고 있던 한 중풍병자는 병이 중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수조차 없는 불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귀신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각색 병든 사람을 치료해 준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그는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그러한 소문을 그대로 믿고 마음에 새기며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꼭 가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중풍병자는 자신이 그렇게 사모하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그의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 앞으로 자기를 인도해 달라는 중풍병자의 간곡한 소원을 들어 주었습니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갔는데 정작 가서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이 계신 집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들것에 실린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그러자 이들의 믿음과 정성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간절한 중심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행함을 보면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도착은 했으나 도저히 용신할 수 없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으니 거기에서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붕까지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았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였는지요.
그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요, 이 중풍병자를 어떻게 하든 예수님 앞에 데려가야 되겠다고 하는 깊은 우정과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어떤 문제를 당했을 때에 그를 살리려고 애쓰는 아름다운 중심을 지니고 있었지요. 사람들 중에는 그 행함에 따라 잘 죽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슬퍼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살리려 했던 것은 그만큼 이 중풍병자가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의인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가실 때에 장례 행렬이 성에서 나왔습니다. 성 안에 사는 어느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염없이 통곡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청년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눅 7:11~16). 어려운 여건에서 기른 사랑스러운 독자를 잃었으니 과부의 참담함과 슬픔이 어떠했겠습니까? 여인은 아들을 다시 살려 준다면 자신의 생명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인은 생명 다해 충성하며 변함없이 붙좇을 중심임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소원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욥바에 사는 여제자 다비다는 어떠하였습니까? 그가 죽자 생전에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 지체 말고 올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니 모든 과부가 그 곁에 서서 울며 다비다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 지어 준 옷가지를 다 내보였습니다. 자신의 안락을 누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다비다의 행함에 감동을 받은 베드로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행 9:36~40).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여인의 행함이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기독교인이 심히 핍박받던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다비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큰 믿음의 행함을 나타냈습니다.
이처럼 의인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네 친구가 중풍병자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를 위해 의를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우쳐야 하겠습니까?
첫째, 의인에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는 후덕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욥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비록 변론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친구들은 욥이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같이 염려하며 권면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만큼 욥에게 입은 은혜가 있고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욥을 위한다면서 그를 깨우치려 한 것이 사람의 생각이고 자기 보기에 의였기 때문에 변론이 일어났지만 처음부터 그런 동기를 가지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의인인지 아닌지 스스로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이라면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를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믿음의 형제들이, 가정에서는 가족이, 일가친척과 이웃이 따릅니다. 의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면 사랑과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축복해 주십니다.
둘째, 의인에게는 믿음의 행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친구가 죽어가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에 믿음으로 구제하고 도우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이런저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믿음으로 친구를 살릴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어떤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지요.
이처럼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정성을 보고 분명히 역사하여 불가능한 것까지라도 가능케 하십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니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예로부터 존경받는 의인은 의로운 행함과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악인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요.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성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네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왔지만 도저히 용신할 수 없자 어떠한 행함을 내보였을까요?
2. 의인의 특징 두 가지를 써 보세요.
① 의인에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는 ( )이 있다.
② 의인에게는 믿음의 ( )이 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65~17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세벨’
시돈 왕의 딸이었던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아합왕과 결혼하면서 시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와 왕은 물론 신하와 백성까지도 우상숭배에 물들게 했다. 이에 북이스라엘은 공의의 심판에 따라 삼 년 반이나 계속된 가뭄과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 큰 어려움을 당해야 했다.
이세벨은 요한계시록 두아디라교회에 보낸 서신에도 등장한다.
마치 하나님과 교통하는 선지자인 양 교묘한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우상숭배, 곧 영적 음행에 빠지게 한 ‘자칭 선지자’의 표상으로 그 이름이 거론되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 앞에 진실한 행함으로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예로부터 존경받는 의인은 의로운 행함과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악인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요.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성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의인과 악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신명기 34장 8절 이하를 보면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맟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모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가 잘 나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했지요.
이와 반면 악인의 죽음은 어떠합니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무수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아돌프 히틀러는 전쟁이 불리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환호했겠습니까.
성경에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시돈 왕의 딸 이세벨입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에게로 시집온 그녀는 왕과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물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며 온갖 악을 행했습니다. 한 번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지 못해 고민할 때에 거짓 증인을 세우고 성의 유력한 사람을 매수하여 무죄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악행을 거듭한 이세벨은 신하들의 손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의 시체를 개들이 먹으므로 장사조차 지낼 수 없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지요. 이처럼 악인에게 힘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듯하지만 결국 힘이 사라지면 모두가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립니다.
2. 진실한 행함으로 믿음의 받침대를 세운 중풍병자와 친구들
본문에 보면 가버나움에 살고 있던 한 중풍병자는 병이 중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수조차 없는 불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귀신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각색 병든 사람을 치료해 준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그는 마음이 선했기 때문에 그러한 소문을 그대로 믿고 마음에 새기며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꼭 가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중풍병자는 자신이 그렇게 사모하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그의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 앞으로 자기를 인도해 달라는 중풍병자의 간곡한 소원을 들어 주었습니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갔는데 정작 가서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이 계신 집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들것에 실린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그러자 이들의 믿음과 정성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간절한 중심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행함을 보면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도착은 했으나 도저히 용신할 수 없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으니 거기에서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붕까지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았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였는지요.
그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요, 이 중풍병자를 어떻게 하든 예수님 앞에 데려가야 되겠다고 하는 깊은 우정과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어떤 문제를 당했을 때에 그를 살리려고 애쓰는 아름다운 중심을 지니고 있었지요. 사람들 중에는 그 행함에 따라 잘 죽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슬퍼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살리려 했던 것은 그만큼 이 중풍병자가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의인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가실 때에 장례 행렬이 성에서 나왔습니다. 성 안에 사는 어느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염없이 통곡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청년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눅 7:11~16). 어려운 여건에서 기른 사랑스러운 독자를 잃었으니 과부의 참담함과 슬픔이 어떠했겠습니까? 여인은 아들을 다시 살려 준다면 자신의 생명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인은 생명 다해 충성하며 변함없이 붙좇을 중심임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소원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욥바에 사는 여제자 다비다는 어떠하였습니까? 그가 죽자 생전에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 지체 말고 올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니 모든 과부가 그 곁에 서서 울며 다비다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 지어 준 옷가지를 다 내보였습니다. 자신의 안락을 누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다비다의 행함에 감동을 받은 베드로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행 9:36~40).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여인의 행함이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기독교인이 심히 핍박받던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다비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큰 믿음의 행함을 나타냈습니다.
이처럼 의인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네 친구가 중풍병자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를 위해 의를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우쳐야 하겠습니까?
첫째, 의인에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는 후덕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욥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비록 변론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친구들은 욥이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같이 염려하며 권면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만큼 욥에게 입은 은혜가 있고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욥을 위한다면서 그를 깨우치려 한 것이 사람의 생각이고 자기 보기에 의였기 때문에 변론이 일어났지만 처음부터 그런 동기를 가지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의인인지 아닌지 스스로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이라면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를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믿음의 형제들이, 가정에서는 가족이, 일가친척과 이웃이 따릅니다. 의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면 사랑과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축복해 주십니다.
둘째, 의인에게는 믿음의 행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친구가 죽어가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에 믿음으로 구제하고 도우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이런저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믿음으로 친구를 살릴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어떤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지요.
이처럼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정성을 보고 분명히 역사하여 불가능한 것까지라도 가능케 하십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니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예로부터 존경받는 의인은 의로운 행함과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진한 감동과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악인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요.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성경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네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왔지만 도저히 용신할 수 없자 어떠한 행함을 내보였을까요?
2. 의인의 특징 두 가지를 써 보세요.
① 의인에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는 ( )이 있다.
② 의인에게는 믿음의 ( )이 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65~17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세벨’
시돈 왕의 딸이었던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아합왕과 결혼하면서 시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와 왕은 물론 신하와 백성까지도 우상숭배에 물들게 했다. 이에 북이스라엘은 공의의 심판에 따라 삼 년 반이나 계속된 가뭄과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 큰 어려움을 당해야 했다.
이세벨은 요한계시록 두아디라교회에 보낸 서신에도 등장한다.
마치 하나님과 교통하는 선지자인 양 교묘한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우상숭배, 곧 영적 음행에 빠지게 한 ‘자칭 선지자’의 표상으로 그 이름이 거론되었다.
2019-11-15
제46과하나님께 감사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갈라디아서 6:9 ㅣ 참고 말씀: 야고보서 2:22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참으로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지요.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3절에는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먼저,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람에게 어떤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애굽 군대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요단 강물이 멈추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았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해도, 또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직접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만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이 말라 죽어가면서도 눈앞에 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는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고, 주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 수많은 방법들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바로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말씀들이 그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신속하게 죄악들을 벗어 버리고 뜨겁게 충성하며 달려가는 것이지요.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내고 감정을 품으며,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두기 위해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변개함 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성을 점령하게 하시면서 단지 여리고성 주변을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 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철벽 같은 성을 돈다고 해서 성이 무너질 리도 없습니다. 더구나 성 안에서 먼저 공격을 해올 수도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온전히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칠 일이라는 날 수를 채우고, 칠 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아서 총 열세 바퀴를 다 돌았을 때 비로소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는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았던 야곱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개함이 없을 때, 믿음과 행함으로 심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기도한 것과 반대로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낙심하고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로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해 버리면 그 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다고 해도 열매로 거둘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 하셨을 때 출애굽해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며 여리고성을 끝까지 돌아서 성을 점령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온전히 믿고 행하되 변개함이 없이 행할 때라야 축복을 받고 거둘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추수감사절을 맞아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한다.
②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 )과 행함을 내보여야 한다.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여리고’
여리고는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으며 대륙을 연결해 주는 위치에 있어서 고대에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 점령한 성읍으로 점령할 당시 백성들은 육 일 동안 매일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돌고 칠 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며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자 성이 무너졌다(수 6장).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재건하지 말라고 명했다. 만일 무너진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아들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실제로 아합왕 때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성을 재건하다가 장자와 계자가 죽는 화를 당했다(왕상 16:34).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참으로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지요.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3절에는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먼저,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람에게 어떤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애굽 군대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요단 강물이 멈추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았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해도, 또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직접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만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이 말라 죽어가면서도 눈앞에 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는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고, 주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 수많은 방법들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바로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말씀들이 그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신속하게 죄악들을 벗어 버리고 뜨겁게 충성하며 달려가는 것이지요.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며, 마음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내고 감정을 품으며,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두기 위해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변개함 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성을 점령하게 하시면서 단지 여리고성 주변을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 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철벽 같은 성을 돈다고 해서 성이 무너질 리도 없습니다. 더구나 성 안에서 먼저 공격을 해올 수도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온전히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칠 일이라는 날 수를 채우고, 칠 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아서 총 열세 바퀴를 다 돌았을 때 비로소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는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았던 야곱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개함이 없을 때, 믿음과 행함으로 심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기도한 것과 반대로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낙심하고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로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해 버리면 그 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다고 해도 열매로 거둘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 하셨을 때 출애굽해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며 여리고성을 끝까지 돌아서 성을 점령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온전히 믿고 행하되 변개함이 없이 행할 때라야 축복을 받고 거둘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추수감사절을 맞아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한다.
②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 )과 행함을 내보여야 한다.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여리고’
여리고는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으며 대륙을 연결해 주는 위치에 있어서 고대에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 점령한 성읍으로 점령할 당시 백성들은 육 일 동안 매일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돌고 칠 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며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자 성이 무너졌다(수 6장).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재건하지 말라고 명했다. 만일 무너진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아들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실제로 아합왕 때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성을 재건하다가 장자와 계자가 죽는 화를 당했다(왕상 16:34).
2019-11-08
제45과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브리서 11:6
읽을말씀 : 히브리서 11:6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6 l 참고 말씀: 민수기 14:7~9
교육목표 : 현실의 어려움과 문제 앞에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봄으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운동선수 중에는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금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는 혹독한 훈련이 따릅니다. 그 과정을 잘 인내하여 금메달을 땄을 때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감독, 국민에게도 큰 기쁨이 되지요. 마찬가지로 신앙 안에서도 믿음의 훈련을 잘 마쳐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하면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 창조주이며 심판자이십니다. 학개 2장 8절을 보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람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부귀를 주실 수도 있고, 권세자로 세우거나 폐할 수도 있습니다.
역대하 25장 8절에는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불리한 전쟁에서도 크게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적군을 물리쳐 승리하였습니다(삿 7장).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적의 내부에 자중지란이 일어나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 경우도 있습니다. 여호사밧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거룩한 옷을 입은 성가대를 군대 앞에 세워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니 하나님이 친히 싸워 이기게 해 주셨지요(대하 20:21~28).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질병 치료는 물론, 사업이 위태해도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형통케 하며 크게 일으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불화한 가정이라도 화평하고 아름다운 가정으로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 핍박하던 배우자의 마음을 순간에 돌이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해 드리느냐,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
모세는 어떤 믿음을 내보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계속 머물렀다면 호화로운 궁전에서 마음껏 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의 낙은 잠시 잠깐이고 결과는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과감히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믿음으로 고난받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애굽 나라의 왕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길을 좇았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상 주심을 바라보고 그 길을 갈 수 있었지요.
광야에서의 40년간 연단을 통해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며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이 된 모세는 큰 기사와 표적을 나타냅니다. 애굽에 열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며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을 높여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이 가나안 거민을 두려워하여 모세를 원망할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며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민 14:9).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그들의 고백은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다른 열 정탐꾼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했습니다. 즉 건장하고 힘센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왜소하여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 정탐꾼의 보고에 백성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온 백성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 통곡했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이 본 땅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포도 열매를 혼자 들기도 버거워 장정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이동할 정도로 크고 탐스러웠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의 눈에도 호전적이고 사나운 가나안 족속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철병거를 가진 족속도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아무런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에 비한다면 가나안 거민들은 타고난 용사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이나 문제보다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 반석에서 물을 내어 수백만이 넘는 백성을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아무리 철병거로 무장했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녕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나안 거민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영적인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 계수된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군하면 무엇이든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안 될 것이 없습니다.
3.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나오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기도받고 단번에 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1년, 2년, 10년이 가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역사로 치료받은 뒤에 변치 않고 영광 돌릴 수 있는 중심이라면 아직은 믿음이 없다 해도 치료해 주십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고 얼마나 정성을 내보여 행하느냐에 따라 치료받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며 얼마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따릅니다.
나아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어려운 일, 즉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귀신이 나가는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행함과 정성과 중심, 그리고 사랑과 헌신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의롭고 선한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믿음이 옵니다. 비진리와 악의 모습을 벗고 진리를 좇는 만큼 하나님과 하나 되는 만큼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아는 육적인 믿음을 소유하는데 이것은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우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듣고 배워서 행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날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쁘시게 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모세는 어떤 믿음을 내보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2.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온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떠한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을까요?
3. 영적인 믿음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51~16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사밧왕’
유다 4대 왕으로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는 등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대하 17장). 레위 사람, 제사장을 뽑아 지방을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공정한 재판을 하게 했다. 그는 모압과 암몬이
공격해 왔을 때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 그런데 아들 여호람을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 아달랴와
정략결혼을 시켜 훗날 유다가 종교적으로 부패하는 데 원인
제공을 했다.
교육목표 : 현실의 어려움과 문제 앞에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봄으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운동선수 중에는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금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는 혹독한 훈련이 따릅니다. 그 과정을 잘 인내하여 금메달을 땄을 때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감독, 국민에게도 큰 기쁨이 되지요. 마찬가지로 신앙 안에서도 믿음의 훈련을 잘 마쳐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하면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 창조주이며 심판자이십니다. 학개 2장 8절을 보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람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부귀를 주실 수도 있고, 권세자로 세우거나 폐할 수도 있습니다.
역대하 25장 8절에는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불리한 전쟁에서도 크게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적군을 물리쳐 승리하였습니다(삿 7장).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적의 내부에 자중지란이 일어나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 경우도 있습니다. 여호사밧왕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거룩한 옷을 입은 성가대를 군대 앞에 세워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니 하나님이 친히 싸워 이기게 해 주셨지요(대하 20:21~28).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질병 치료는 물론, 사업이 위태해도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순식간에 형통케 하며 크게 일으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불화한 가정이라도 화평하고 아름다운 가정으로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 핍박하던 배우자의 마음을 순간에 돌이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해 드리느냐,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
모세는 어떤 믿음을 내보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계속 머물렀다면 호화로운 궁전에서 마음껏 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의 낙은 잠시 잠깐이고 결과는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과감히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믿음으로 고난받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애굽 나라의 왕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길을 좇았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상 주심을 바라보고 그 길을 갈 수 있었지요.
광야에서의 40년간 연단을 통해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며 온 집에 충성하는 사람이 된 모세는 큰 기사와 표적을 나타냅니다. 애굽에 열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며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을 높여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이 가나안 거민을 두려워하여 모세를 원망할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며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민 14:9).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그들의 고백은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다른 열 정탐꾼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했습니다. 즉 건장하고 힘센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왜소하여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 정탐꾼의 보고에 백성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온 백성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 통곡했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이 본 땅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포도 열매를 혼자 들기도 버거워 장정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이동할 정도로 크고 탐스러웠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의 눈에도 호전적이고 사나운 가나안 족속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철병거를 가진 족속도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아무런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에 비한다면 가나안 거민들은 타고난 용사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이나 문제보다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 반석에서 물을 내어 수백만이 넘는 백성을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아무리 철병거로 무장했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녕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나안 거민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영적인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 계수된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군하면 무엇이든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안 될 것이 없습니다.
3.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나오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기도받고 단번에 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1년, 2년, 10년이 가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역사로 치료받은 뒤에 변치 않고 영광 돌릴 수 있는 중심이라면 아직은 믿음이 없다 해도 치료해 주십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고 얼마나 정성을 내보여 행하느냐에 따라 치료받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며 얼마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따릅니다.
나아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어려운 일, 즉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귀신이 나가는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행함과 정성과 중심, 그리고 사랑과 헌신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의롭고 선한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믿음이 옵니다. 비진리와 악의 모습을 벗고 진리를 좇는 만큼 하나님과 하나 되는 만큼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아는 육적인 믿음을 소유하는데 이것은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우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듣고 배워서 행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날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쁘시게 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모세는 어떤 믿음을 내보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2.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온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떠한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을까요?
3. 영적인 믿음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51~16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사밧왕’
유다 4대 왕으로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는 등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대하 17장). 레위 사람, 제사장을 뽑아 지방을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공정한 재판을 하게 했다. 그는 모압과 암몬이
공격해 왔을 때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 그런데 아들 여호람을 북이스라엘 아합의 딸 아달랴와
정략결혼을 시켜 훗날 유다가 종교적으로 부패하는 데 원인
제공을 했다.
2019-11-01
제44과들풀도 입히시거든
마태복음 6:26~33
읽을말씀 : 마태복음 6:26~3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6:33 ㅣ 참고 말씀: 전도서 1:2~3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함으로 세상의 헛된 삶을 살지 않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 염려,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재물이 많고 아무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질병이나 가족 간의 문제 등 이런저런 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이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삶의 분야
중국을 통일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진시황도 그 삶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불과 50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이처럼 세상에서 고민하며 수고하고 힘써 무언가를 이루었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말씀하시지요(마 6:25~27). 만일 염려해서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상할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귀와 권세, 재물과 건강을 위해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며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염려하며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요? 창세기 3장 17절 이하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땀 흘려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나 질병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진시황과 같이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2.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된 삶
솔로몬은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왕입니다. 금이 넘쳐 나고 은은 돌같이 여길 정도였으며, 고급 목재인 백향목도 평지의 뽕나무같이 허다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예물을 가져오고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쳤으니 그 권력과 명성은 어마어마했지요. 이런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 입은 옷이 들꽃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9절에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들에 핀 꽃은 자신이 수고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름답게 핍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알맞은 햇볕과 온도를 주는 등 적절한 환경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솔로몬이 그만한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해야 했겠습니까? 사람이 열매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합니까?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수고와 물질이 필요한지요. 우리는 이처럼 무엇을 얻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는데 들에 피는 꽃은 수고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히 피어납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것이 수고임을 깨닫고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기 원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 대가가 미미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구나 많은 수고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죽음을 맞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 왕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분명히 느끼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명예나 권세, 부귀와 영화 등은 언젠가는 안개처럼 없어질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정녕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참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까요?
3.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들풀도 입히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하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헛되지 않은 삶을 살며 영원한 복락을 누리려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이는 주님의 증인이 되어 내 부모 형제, 일가친척에게 전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일터, 사업터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나라와 민족, 세계 복음화를 위해 불같이 기도해야 할 것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혼을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의식주 문제는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진리를 행하는 것, 자기 삶을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영혼이 잘되기 위하여 즉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칩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게 되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어둠에서 나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것, 성령의 소욕을 좇아 진리대로 행하며 성결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
어떤 성도는 “그동안 여러 사명을 맡아 하나님 일을 했는데, 이젠 성결되기 위해 잠시 사명을 맡지 않고 열심히 기도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는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만 구하겠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병행해서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을 낼 때 위로부터 힘과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더욱 신속히 이루도록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2.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이 들에 핀 꽃보다도 못하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39~1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려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와 영광까지 받았다. 왕이 된 지 4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건축하여 7년 만에 완공하였고, 13년에 걸쳐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였다.
주변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이방 신전을 세우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해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함으로 세상의 헛된 삶을 살지 않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 염려,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재물이 많고 아무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질병이나 가족 간의 문제 등 이런저런 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이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삶의 분야
중국을 통일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진시황도 그 삶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불과 50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이처럼 세상에서 고민하며 수고하고 힘써 무언가를 이루었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말씀하시지요(마 6:25~27). 만일 염려해서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상할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귀와 권세, 재물과 건강을 위해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며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염려하며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요? 창세기 3장 17절 이하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땀 흘려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나 질병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진시황과 같이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눈물, 슬픔, 고통, 질병, 사망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2.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된 삶
솔로몬은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왕입니다. 금이 넘쳐 나고 은은 돌같이 여길 정도였으며, 고급 목재인 백향목도 평지의 뽕나무같이 허다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예물을 가져오고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쳤으니 그 권력과 명성은 어마어마했지요. 이런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 입은 옷이 들꽃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9절에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들에 핀 꽃은 자신이 수고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름답게 핍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알맞은 햇볕과 온도를 주는 등 적절한 환경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솔로몬이 그만한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수고하고 노력해야 했겠습니까? 사람이 열매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합니까?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수고와 물질이 필요한지요. 우리는 이처럼 무엇을 얻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는데 들에 피는 꽃은 수고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히 피어납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것이 수고임을 깨닫고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기 원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 대가가 미미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구나 많은 수고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죽음을 맞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 왕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분명히 느끼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명예나 권세, 부귀와 영화 등은 언젠가는 안개처럼 없어질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정녕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참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까요?
3.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들풀도 입히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하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헛되지 않은 삶을 살며 영원한 복락을 누리려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이는 주님의 증인이 되어 내 부모 형제, 일가친척에게 전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일터, 사업터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나라와 민족, 세계 복음화를 위해 불같이 기도해야 할 것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혼을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의식주 문제는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진리를 행하는 것, 자기 삶을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영혼이 잘되기 위하여 즉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우칩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게 되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어둠에서 나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것, 성령의 소욕을 좇아 진리대로 행하며 성결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임합니다.
어떤 성도는 “그동안 여러 사명을 맡아 하나님 일을 했는데, 이젠 성결되기 위해 잠시 사명을 맡지 않고 열심히 기도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는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만 구하겠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병행해서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을 낼 때 위로부터 힘과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더욱 신속히 이루도록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2.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이 들에 핀 꽃보다도 못하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39~1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려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와 영광까지 받았다. 왕이 된 지 4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건축하여 7년 만에 완공하였고, 13년에 걸쳐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였다.
주변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국력을 신장시켰지만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이방 신전을 세우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해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2019-10-25
제43과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태복음 15:24~28
읽을말씀 : 마태복음 15:24~28 | 외울말씀 : 로마서 1:17 ㅣ 참고 말씀: 사무엘상 21장
교육목표 :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존귀히 여김을 받는 큰 자가 되게 한다.
자존심이란 ‘자기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기며 사랑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자존심을 내세우다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존심을 버리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였기에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 자존심을 버림으로 생명을 건진 다윗
다윗이 아직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입니다. 그는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에 속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갑니다(삼상 21장).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국으로 다윗은 사울의 휘하에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아기스의 신하들은 이를 왕에게 알립니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곤경에 처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이런 행동을 보고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하며 쫓아내 버렸지요. 다윗은 자존심을 버리고 미친 척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블레셋으로부터 조공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만일 다윗이 자존심을 세우다 아기스의 손에 죽었다면 위대한 왕이 될 수 없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죽을망정 그렇게는 못하겠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이 가치가 있는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옳은지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죽이는 악은 행치 않았지요. 도리어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에 비유하며 사울을 죽일 의사가 없다고 하자 이에 악한 사울도 감동을 받았습니다(삼상 24장). 결국 연단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높여 주셨고 그는 견고한 통일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2. 자존심을 내세우다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사울과 시드기야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을 때에 회개하기는커녕 백성 앞에서 자기의 자존심을 세워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위를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실을 알고는 다윗을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요.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두 차례에 걸쳐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똑똑한 귀인들은 다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힘없는 백성만 유다에 남았지요. 이때 시드기야왕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게 소환을 당해 국정을 보고하고 조공을 바치고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왕이 애굽 왕 바로와 비밀리에 동맹관계를 맺고 내통하다가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지요.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지만 시드기야는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선지자를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아무 힘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세 번째 침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성은 바벨론에 무려 1년 7개월간 포위되어 성 안의 보급 물자들이 완전히 끊기고, 식량도 떨어져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습니다. 게다가 바벨론 군대가 성벽을 뚫고 들어와 시드기야와 군사들은 한밤중에 도망치다 결국 붙잡히고 맙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완전히 함락되어 버렸습니다.
바벨론 왕은 배반한 시드기야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 버리지요. 그리고 포로로 끌고 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시드기야왕은 자존심을 내세움으로 자신뿐 아니라,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존심 때문에 자기를 낮추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인지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3. 겸비한 마음으로 응답받은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마 15:21~28).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였지요.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며 큰소리로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즉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었지요. 여인이 계속하여 소리 지르자 제자들이 나서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할 정도였지요.
그제야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공손히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을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며 이방 여인을 개에 비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개 취급당했다고 자존심이 상해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서운함이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끝까지 예수님께 구하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자 딸이 그때로부터 깨끗이 나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를 철저히 낮춤으로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았습니다.
4. 의로운 중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것은, 오로지 딸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억지로 분을 누르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여 한 말이 아닙니다. 그 중심이 의롭고 겸비했기에 예수님이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을 때도 선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 순간에 지혜를 짜내 “내가 이렇게 대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겠다.” 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선과 겸손이 그대로 나왔을 뿐이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교만을 버리며, 마음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며, 육의 마음을 온전히 버리고 영의 마음, 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요. 그러면 어떤 문제든 응답받을 수 있고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중심이 겸비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중심이 되면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 해도 믿음의 행함이 나오므로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됩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고 그 신뢰에 변함이 없으며 또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과 말씀을 하셔도 요지부동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믿어 드렸습니다. 그러면 순종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서운해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그 말씀에 겸손히 긍정의 고백을 했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말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의롭고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내보이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자존심, 높아지고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여 모든 것에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에 속한 가드 왕에게 가서 어떠한 행동을 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2.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 취급하였을 때 여인은 어떠한 마음과 행함으로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3. 나는 누구일까요?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는데도 자존심을 내세우다 멸망당했습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25~13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수로보니게’
팔레스타인 북부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를 이르는 말이다.
수로보니게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수리아의 베니게란 뜻이다(막 7:26). 마태복음 15장 22절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가나안 여자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가나안이 베니게의 옛 이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교육목표 :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존귀히 여김을 받는 큰 자가 되게 한다.
자존심이란 ‘자기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기며 사랑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자존심을 내세우다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존심을 버리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였기에 이 땅에서는 물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 자존심을 버림으로 생명을 건진 다윗
다윗이 아직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입니다. 그는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에 속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갑니다(삼상 21장).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국으로 다윗은 사울의 휘하에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아기스의 신하들은 이를 왕에게 알립니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곤경에 처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이런 행동을 보고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하며 쫓아내 버렸지요. 다윗은 자존심을 버리고 미친 척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블레셋으로부터 조공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만일 다윗이 자존심을 세우다 아기스의 손에 죽었다면 위대한 왕이 될 수 없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죽을망정 그렇게는 못하겠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이 가치가 있는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옳은지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을 죽이는 악은 행치 않았지요. 도리어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에 비유하며 사울을 죽일 의사가 없다고 하자 이에 악한 사울도 감동을 받았습니다(삼상 24장). 결국 연단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높여 주셨고 그는 견고한 통일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2. 자존심을 내세우다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사울과 시드기야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을 때에 회개하기는커녕 백성 앞에서 자기의 자존심을 세워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위를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실을 알고는 다윗을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요.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두 차례에 걸쳐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똑똑한 귀인들은 다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힘없는 백성만 유다에 남았지요. 이때 시드기야왕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게 소환을 당해 국정을 보고하고 조공을 바치고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왕이 애굽 왕 바로와 비밀리에 동맹관계를 맺고 내통하다가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지요.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지만 시드기야는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선지자를 감옥에 가둬 버립니다. 아무 힘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세 번째 침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성은 바벨론에 무려 1년 7개월간 포위되어 성 안의 보급 물자들이 완전히 끊기고, 식량도 떨어져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습니다. 게다가 바벨론 군대가 성벽을 뚫고 들어와 시드기야와 군사들은 한밤중에 도망치다 결국 붙잡히고 맙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완전히 함락되어 버렸습니다.
바벨론 왕은 배반한 시드기야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 버리지요. 그리고 포로로 끌고 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시드기야왕은 자존심을 내세움으로 자신뿐 아니라,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존심 때문에 자기를 낮추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인지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3. 겸비한 마음으로 응답받은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마 15:21~28).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였지요.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며 큰소리로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즉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었지요. 여인이 계속하여 소리 지르자 제자들이 나서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할 정도였지요.
그제야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공손히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을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며 이방 여인을 개에 비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개 취급당했다고 자존심이 상해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서운함이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끝까지 예수님께 구하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자 딸이 그때로부터 깨끗이 나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를 철저히 낮춤으로 믿음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았습니다.
4. 의로운 중심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것은, 오로지 딸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억지로 분을 누르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여 한 말이 아닙니다. 그 중심이 의롭고 겸비했기에 예수님이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을 때도 선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 순간에 지혜를 짜내 “내가 이렇게 대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겠다.” 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선과 겸손이 그대로 나왔을 뿐이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교만을 버리며, 마음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며, 육의 마음을 온전히 버리고 영의 마음, 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요. 그러면 어떤 문제든 응답받을 수 있고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중심이 겸비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중심이 되면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 해도 믿음의 행함이 나오므로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됩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고 그 신뢰에 변함이 없으며 또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과 말씀을 하셔도 요지부동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믿어 드렸습니다. 그러면 순종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서운해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그 말씀에 겸손히 긍정의 고백을 했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말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의롭고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내보이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자존심, 높아지고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여 모든 것에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블레셋에 속한 가드 왕에게 가서 어떠한 행동을 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2.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 취급하였을 때 여인은 어떠한 마음과 행함으로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3. 나는 누구일까요?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는데도 자존심을 내세우다 멸망당했습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25~13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수로보니게’
팔레스타인 북부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를 이르는 말이다.
수로보니게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수리아의 베니게란 뜻이다(막 7:26). 마태복음 15장 22절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가나안 여자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가나안이 베니게의 옛 이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19-10-18
제42과일천 번제의 정성
열왕기상 3:4~12
읽을말씀 : 열왕기상 3:4~12 | 외울말씀 : 고린도후서 9:7 l 참고 말씀 / 말라기 1:6~9
교육목표 : 솔로몬왕처럼 하나님께 지극한 정성을 내보임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고 축복이 넘쳐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정성을 다한다면 뜻을 이루게 됨을 나타냅니다. 솔로몬왕은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 전무후무한 지혜는 물론 부와 영광까지 받았습니다.
1. 일천 번제를 지극 정성으로 드린 솔로몬
솔로몬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아버지 다윗왕이 정치, 경제, 군사 등 전반적으로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안정 속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지요. 또한 솔로몬은 나단 선지자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기에 힘썼습니다.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무엇보다 먼저 지극한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제물로 가져온 짐승을 하나하나 각을 떠서 불태워 그 향기로 드리는 제사법으로 많은 수고와 정성이 필요하지요. 이는 가장 보편적인 제사법으로서 생명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규례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한 희생과 헌신, 자발적인 봉사를 상징하는 번제를 일천 번이나 드렸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가 여기에 속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예배드릴 때 기쁨 없이 피곤, 졸음, 잡념 속에서 드려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충만하고 구원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중심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얼마나 정성껏, 믿음으로, 사랑으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 궤에 헌금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셨습니다(막 12장). 두 렙돈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 동전 두 닢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과부에게는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중심을 보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정성을 담아 즐거이 드릴 때 기뻐하며 축복하십니다. 솔로몬의 정성 다한 일천 번제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말씀하시니 그는 왕으로서 백성을 재판할 때에 선악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사사로이 명예나 부를 구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시며,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총명은 물론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까지도 겸하여 주셨습니다(왕상 3:13).
2. 정성된 마음으로 행했을 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성된 마음을 흠향하십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완벽하다 해도 마음이 깃들지 않으면 받지 않으시지요. 주의 종이나 부모, 형제, 이웃, 동료 어느 누구를 섬길 때도 마음 다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시므로 정성된 마음으로 했는지 다 아시지요.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솔로몬의 중심과 마음씀씀이를 아셨기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에 시작된 성전 건축은 완공하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성전은 매우 아름답고 정교하며 웅장하게 건축되었습니다.
돌을 뜨는 곳에서 아예 규격에 맞게 다듬어 성전에서 망치나 철 연장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게 했습니다. 성전 내부는 백향목 널판으로 벽에 입힌 후 정금으로 덧입혀 돌이 보이지 않게 하였고, 사면 벽에는 그룹들과 종려와 꽃 핀 형상을 정교하게 아로새겼습니다. 성전 앞에는 기둥 둘을 웅장하게 만들었는데 사슬로 기둥머리에 두르고 석류 일백 개를 달았습니다. 또 등대와 꽃, 등잔과 화 젓가락, 불집게와 주발, 숟가락과 불 옮기는 그릇 등 성전의 기구들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은 정성을 다해 건축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헌물을 드리거나 무엇을 하든지 정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축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으로 구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바로 솔로몬이 사사로이 자신의 부귀영화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한 것처럼 하면 됩니다. 즉 자기 유익이 아닌 상대의 유익을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영혼들을 위해 구하면 기뻐하시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수넴의 귀부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그 지방을 지날 때면 음식을 대접하고 쉴 수 있는 방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여인의 섬김에 감동한 엘리사가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아들이 없음을 알고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정성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니 구하지 않은 축복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기보다 백성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진리 곧 선을 행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3. 하나님 앞에 감동적인 정성을 보인 사람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치료받기 위해 엘리사를 찾아갈 때 많은 금은과 귀한 의복을 정성껏 준비하여 갔습니다. 엘리사가 그것을 받지 않았지만 나아만의 정성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치료받을 수 있었지요. 또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길손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마치 주를 섬기듯 대접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고대하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축복의 예언을 또다시 듣지요.
야곱은 자기를 미워하는 형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형의 감정을 풀고자 했지요.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주관하여 화해할 수 있었지만 야곱의 정성 역시 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이 자원하여 너도 나도 즐거이 예물을 드렸는데 어찌나 많이 드렸던지 그만 가져오도록 공포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백성의 정성이 그처럼 지극했던 것입니다.
삭개오의 정성과 사모함은 어떻습니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 따위는 생각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지요(눅 19장). 그의 사모함을 아신 예수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십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감격에 찬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하지요.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시며 구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며 지극한 정성과 사모함을 보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신약 시대 안나 선지자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어머니 한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였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또 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자녀를 얻었습니다. 엘리사는 끝까지 스승 엘리야를 붙좇는 정성을 보임으로 스승의 갑절의 영감을 받았지요.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극한 정성을 내보임으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풍족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 )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 )로
드리기 원하신다.
2. 축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구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13~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솔로몬 성전
솔로몬왕이 온갖 귀한 자재들과 황금 보석을 드려 지은 아름다운
성전이다. 이 성전을 봉헌할 때 그 안에는 영광의 구름이 가득했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을 살라 그 향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에 나오는 이들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나오기만 한다면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리라 약속하셨다.
그러나 B.C. 586년 남유다가 멸망할 때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율법을 어기고 죄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 가운데서 떠나셨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떠나신 결과
성전도 훼파된 것이다.
교육목표 : 솔로몬왕처럼 하나님께 지극한 정성을 내보임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고 축복이 넘쳐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정성을 다한다면 뜻을 이루게 됨을 나타냅니다. 솔로몬왕은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 전무후무한 지혜는 물론 부와 영광까지 받았습니다.
1. 일천 번제를 지극 정성으로 드린 솔로몬
솔로몬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아버지 다윗왕이 정치, 경제, 군사 등 전반적으로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안정 속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지요. 또한 솔로몬은 나단 선지자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기에 힘썼습니다.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무엇보다 먼저 지극한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제물로 가져온 짐승을 하나하나 각을 떠서 불태워 그 향기로 드리는 제사법으로 많은 수고와 정성이 필요하지요. 이는 가장 보편적인 제사법으로서 생명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규례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한 희생과 헌신, 자발적인 봉사를 상징하는 번제를 일천 번이나 드렸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가 여기에 속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예배드릴 때 기쁨 없이 피곤, 졸음, 잡념 속에서 드려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충만하고 구원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중심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얼마나 정성껏, 믿음으로, 사랑으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 궤에 헌금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셨습니다(막 12장). 두 렙돈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 동전 두 닢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과부에게는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중심을 보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정성을 담아 즐거이 드릴 때 기뻐하며 축복하십니다. 솔로몬의 정성 다한 일천 번제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말씀하시니 그는 왕으로서 백성을 재판할 때에 선악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사사로이 명예나 부를 구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시며, 솔로몬이 구한 지혜와 총명은 물론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까지도 겸하여 주셨습니다(왕상 3:13).
2. 정성된 마음으로 행했을 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성된 마음을 흠향하십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완벽하다 해도 마음이 깃들지 않으면 받지 않으시지요. 주의 종이나 부모, 형제, 이웃, 동료 어느 누구를 섬길 때도 마음 다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감찰하시므로 정성된 마음으로 했는지 다 아시지요.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솔로몬의 중심과 마음씀씀이를 아셨기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에 시작된 성전 건축은 완공하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성전은 매우 아름답고 정교하며 웅장하게 건축되었습니다.
돌을 뜨는 곳에서 아예 규격에 맞게 다듬어 성전에서 망치나 철 연장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게 했습니다. 성전 내부는 백향목 널판으로 벽에 입힌 후 정금으로 덧입혀 돌이 보이지 않게 하였고, 사면 벽에는 그룹들과 종려와 꽃 핀 형상을 정교하게 아로새겼습니다. 성전 앞에는 기둥 둘을 웅장하게 만들었는데 사슬로 기둥머리에 두르고 석류 일백 개를 달았습니다. 또 등대와 꽃, 등잔과 화 젓가락, 불집게와 주발, 숟가락과 불 옮기는 그릇 등 성전의 기구들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은 정성을 다해 건축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헌물을 드리거나 무엇을 하든지 정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축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으로 구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바로 솔로몬이 사사로이 자신의 부귀영화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한 것처럼 하면 됩니다. 즉 자기 유익이 아닌 상대의 유익을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영혼들을 위해 구하면 기뻐하시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수넴의 귀부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그 지방을 지날 때면 음식을 대접하고 쉴 수 있는 방을 마련해 드렸습니다. 여인의 섬김에 감동한 엘리사가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아들이 없음을 알고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정성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니 구하지 않은 축복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기보다 백성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진리 곧 선을 행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3. 하나님 앞에 감동적인 정성을 보인 사람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치료받기 위해 엘리사를 찾아갈 때 많은 금은과 귀한 의복을 정성껏 준비하여 갔습니다. 엘리사가 그것을 받지 않았지만 나아만의 정성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치료받을 수 있었지요. 또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길손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마치 주를 섬기듯 대접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고대하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축복의 예언을 또다시 듣지요.
야곱은 자기를 미워하는 형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형의 감정을 풀고자 했지요.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주관하여 화해할 수 있었지만 야곱의 정성 역시 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이 자원하여 너도 나도 즐거이 예물을 드렸는데 어찌나 많이 드렸던지 그만 가져오도록 공포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백성의 정성이 그처럼 지극했던 것입니다.
삭개오의 정성과 사모함은 어떻습니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 따위는 생각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지요(눅 19장). 그의 사모함을 아신 예수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십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감격에 찬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하지요.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시며 구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며 지극한 정성과 사모함을 보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신약 시대 안나 선지자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어머니 한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였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또 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자녀를 얻었습니다. 엘리사는 끝까지 스승 엘리야를 붙좇는 정성을 보임으로 스승의 갑절의 영감을 받았지요.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극한 정성을 내보임으로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풍족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 )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 )로
드리기 원하신다.
2. 축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구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13~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솔로몬 성전
솔로몬왕이 온갖 귀한 자재들과 황금 보석을 드려 지은 아름다운
성전이다. 이 성전을 봉헌할 때 그 안에는 영광의 구름이 가득했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을 살라 그 향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에 나오는 이들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나오기만 한다면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리라 약속하셨다.
그러나 B.C. 586년 남유다가 멸망할 때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율법을 어기고 죄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 가운데서 떠나셨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떠나신 결과
성전도 훼파된 것이다.
2019-10-11
제41과율법을 행하는 자
로마서 2:13
읽을말씀 : 로마서 2:13 | 외울말씀 : 야고보서 2:22 ㅣ 참고 말씀 / 요한일서 1:5~7, 마태복음 7:21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심비에 새기고 지켜 행함으로 진정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자녀를 낳아 길러 보면 부모의 모습을 닮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걸음걸이, 습관까지 꼭 닮기도 하지요. 만일 부모가 조급한 성격이라면 자녀도 조급하기 쉽고, 폭력적이라면 그 성향을 물려받기도 합니다. 또 부모가 유난히 시기 질투가 많으면 자녀도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타고난 성격은 사람마다 다르며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성현의 교훈을 통해 마음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밝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따라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기질, 죄의 속성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1. 저마다 다르게 타고난 마음 중심
조선 시대 폭군 연산군의 어머니는 지나치게 질투심이 강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 연산군도 시기심이 많고 포악할 뿐 아니라,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며 온갖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왕족으로 태어나 훌륭한 스승의 교육을 받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에다 악을 쌓아가니 마음 중심이 악해져 갔지요.
사람의 마음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성과 자신이 성장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통해 형성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굳혀진 것이 중심이지요. 사람은 마음 중심에 따라 선을 추구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비록 태어날 때 좋지 않은 기질을 물려받았어도 변화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만나 성결을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말씀대로 행하면, 결국에는 좋은 중심이 만들어지게 되지요.
연산군과 달리 다니엘의 세 친구는 선한 중심을 가졌기에 이방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금하신 가증한 음식은 먹지 않았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우상에 절하지 않는 곧은 신앙을 가졌지요.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니 이방 나라에서도 중책을 맡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 마음의 의를 이루어야 진정한 의인
어떤 사람은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버리고 의인이 되어야 할 것을 무수히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는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죄를 다 벗어 버리고 마음 중심을 온전히 진리로 일구어야 참된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연단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러한 연단을 통과해야 값진 열매로 나올 수 있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원래 자기 의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 히브리 사람을 애굽 사람이 치는 것을 보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추었지요. 그 후 40년의 연단을 통해 철저히 자기 의가 깨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습니다. 악한 백성을 대신하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져도 좋으니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구할 정도로 온유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지요(출 32:32).
이처럼 진정한 의인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 중심에 있는 악을 빼냄으로 마음의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율법을 들어서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진정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려면 두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진리의 말씀을 앎으로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즉 “기도하라” 했으니 기도하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했으니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온전히 이루어 행하는 단계입니다. 곧 온전한 행함의 단계이지요.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쁨으로 할 때 온전한 행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온전한 행함에 따르는 축복
우리가 온전한 행함의 단계로 들어가려면 먼저는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하지 않고, “버리라” 하신 것은 버려야 합니다. 즉 “미워하지 말라, 시기 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죄를 버리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대로 하지 않고 버리면 옥토 같은 마음이 됩니다.
더불어 하나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즉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열심히 행하면 믿음이 성장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지요. 즉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원수도 사랑하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법의 제재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할 수 없으므로 시험 환난과 질병이 떠나며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니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혹여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율법을 지켰을지라도 마음의 악이 버려지는 만큼 차츰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영혼이 잘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는 것이며,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면 스스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응답받을 수 있지요. 질병이나 가정의 화목, 가정 복음화를 비롯한 그 어떤 문제라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4.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행함이 따르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어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똑같이 듣는 데도 사람마다 믿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 사람의 마음 중심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얼마나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면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니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을 믿는다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입니다(롬 2:13).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했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짝을 이루어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서 믿는 사람은 당연히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마음에 믿고 행하면서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요,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되어 구원은 물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의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진정한 의인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통해 ( )을 발견하고 마음 중심에 있는 악을 빼냄으로 마음의 ( )를 이뤄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는 데도 사람마다 믿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03~11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네 가지 마음밭’(마태복음 13장)
1. 길가밭: 단단히 굳은 밭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하는 마음밭을 말한다.
2. 돌밭: 돌멩이가 있어 싹이 나도 잘 자라지 못하는 밭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
믿음의 확신이 없고 시험 환난이 오면 넘어져 버린다.
3. 가시떨기밭: 가시떨기로 인해 싹이 잘 자라지 못하는 밭이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한다 해도 탐욕과 재리의 유혹, 세상의 염려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한다.
4. 좋은 밭: 씨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를 거두는 밭이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기에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심비에 새기고 지켜 행함으로 진정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자녀를 낳아 길러 보면 부모의 모습을 닮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걸음걸이, 습관까지 꼭 닮기도 하지요. 만일 부모가 조급한 성격이라면 자녀도 조급하기 쉽고, 폭력적이라면 그 성향을 물려받기도 합니다. 또 부모가 유난히 시기 질투가 많으면 자녀도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타고난 성격은 사람마다 다르며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성현의 교훈을 통해 마음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밝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따라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기질, 죄의 속성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1. 저마다 다르게 타고난 마음 중심
조선 시대 폭군 연산군의 어머니는 지나치게 질투심이 강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 연산군도 시기심이 많고 포악할 뿐 아니라,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며 온갖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왕족으로 태어나 훌륭한 스승의 교육을 받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에다 악을 쌓아가니 마음 중심이 악해져 갔지요.
사람의 마음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성과 자신이 성장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통해 형성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굳혀진 것이 중심이지요. 사람은 마음 중심에 따라 선을 추구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비록 태어날 때 좋지 않은 기질을 물려받았어도 변화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만나 성결을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말씀대로 행하면, 결국에는 좋은 중심이 만들어지게 되지요.
연산군과 달리 다니엘의 세 친구는 선한 중심을 가졌기에 이방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도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금하신 가증한 음식은 먹지 않았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우상에 절하지 않는 곧은 신앙을 가졌지요.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니 이방 나라에서도 중책을 맡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 마음의 의를 이루어야 진정한 의인
어떤 사람은 “죄를 버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버리고 의인이 되어야 할 것을 무수히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는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죄를 다 벗어 버리고 마음 중심을 온전히 진리로 일구어야 참된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연단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이러한 연단을 통과해야 값진 열매로 나올 수 있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원래 자기 의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 히브리 사람을 애굽 사람이 치는 것을 보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추었지요. 그 후 40년의 연단을 통해 철저히 자기 의가 깨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습니다. 악한 백성을 대신하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이 지워져도 좋으니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구할 정도로 온유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지요(출 32:32).
이처럼 진정한 의인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 중심에 있는 악을 빼냄으로 마음의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율법을 들어서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진정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려면 두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진리의 말씀을 앎으로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즉 “기도하라” 했으니 기도하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했으니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온전히 이루어 행하는 단계입니다. 곧 온전한 행함의 단계이지요.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쁨으로 할 때 온전한 행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온전한 행함에 따르는 축복
우리가 온전한 행함의 단계로 들어가려면 먼저는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하지 않고, “버리라” 하신 것은 버려야 합니다. 즉 “미워하지 말라, 시기 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죄를 버리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대로 하지 않고 버리면 옥토 같은 마음이 됩니다.
더불어 하나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즉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열심히 행하면 믿음이 성장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지요. 즉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원수도 사랑하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법의 제재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할 수 없으므로 시험 환난과 질병이 떠나며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니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혹여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율법을 지켰을지라도 마음의 악이 버려지는 만큼 차츰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영혼이 잘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는 것이며,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면 스스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응답받을 수 있지요. 질병이나 가정의 화목, 가정 복음화를 비롯한 그 어떤 문제라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4.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행함이 따르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어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똑같이 듣는 데도 사람마다 믿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 사람의 마음 중심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얼마나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면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니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을 믿는다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입니다(롬 2:13).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했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짝을 이루어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서 믿는 사람은 당연히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마음에 믿고 행하면서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요,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되어 구원은 물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의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진정한 의인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통해 ( )을 발견하고 마음 중심에 있는 악을 빼냄으로 마음의 ( )를 이뤄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는 데도 사람마다 믿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03~11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네 가지 마음밭’(마태복음 13장)
1. 길가밭: 단단히 굳은 밭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하는 마음밭을 말한다.
2. 돌밭: 돌멩이가 있어 싹이 나도 잘 자라지 못하는 밭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
믿음의 확신이 없고 시험 환난이 오면 넘어져 버린다.
3. 가시떨기밭: 가시떨기로 인해 싹이 잘 자라지 못하는 밭이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한다 해도 탐욕과 재리의 유혹, 세상의 염려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한다.
4. 좋은 밭: 씨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를 거두는 밭이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기에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한다.
2019-10-04
제40과욥의 행사
욥기 1:1~5
읽을말씀 : 욥기 1:1~5 | 외울말씀 : 욥기 23:10 ㅣ 참고 말씀: 욥기 29:8~17, 31:16~32
교육목표 : 욥처럼 진정한 의인이 되기 위해 본성 속의 악을 발견하여 벗어 버림으로 영육 간에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드러나면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십니다.
다이아몬드가 원석일 때에는 가치가 적은 돌에 불과하지만 갈고 다듬으면 찬란한 빛을 내는 보석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도 연단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이 되어 축복받을 수 있는지 욥의 신앙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동방에서 가장 큰 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욥 1:3)라 할 만큼 재물이 많았지요. 양이 칠천, 약대가 삼천,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 있었습니다. 한 겨리는 두 마리를 의미하니 소만 해도 천 마리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양과 약대는 그보다 몇 곱절 많았으니 엄청난 재산을 가진 거부였지요.
하나님께서는 욥을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하셨습니다. ‘큰 자’란 사람마다 관점이 달라서 재물이 많고 바르게 쓸 줄 아는 사람, 혹은 지식이 많으며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하거나 사랑과 덕이 많아 존경받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존경할 만하다고 인정하는 큰 자는 단지 눈에 드러난 업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자로 여길 수 있는 마음씀이나 됨됨이가 좋아서 존경할 만한 기본 조건을 갖춘 사람을 말하지요. 마음 됨됨이가 좋은 사람은 시킨 일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많은 것을 포용력 있게 잘 감당합니다.
두루 살필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얼마나 정성을 다하느냐에 따라 마음 그릇의 크고 작은 정도에 차이가 납니다. 모든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이루는 것이 마음 됨됨이를 좋게 하는 길입니다.
욥은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며 큰 자로서 마음 씀씀이가 고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지혜와 지식으로 많은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풍부한 재물을 사람들에게 후히 베풀며 도왔으니 참으로 큰 자라 할 수 있지요.
그 밖에도 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며 행해도 욥만은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잔칫날이 지나면 아침에 일어나 아들들을 부르고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혹시 그들이 잔치 중에 실수하여 죄를 지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욥을 하나님은 순전하다 여기셨습니다. 더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것, 곧 모든 자녀와 재산을 다 거두어 가셨어도 감사하였습니다.
2. 연단을 통해 온전한 의인이 된 욥
욥은 자녀와 재물을 다 잃는 엄청난 일을 당했어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계속하여 시험 환난이 다가왔습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심해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비참한 모습으로 변했지요. 그의 아내는 위로는커녕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비웃으며 저주하지만 욥은 입술로도 범죄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순전한 욥도 통과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는 의롭고 진실했으며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런 고통을 주고 멸시받게 하시는가?” 했지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진정 원하셨던 것은 변함없이 진실하며 악이 없는 온전한 마음이었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지,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지 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욥은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도 감사했지만 시련이 계속되자 마침내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자 깊이 감춰진 악이 드러났지요.
마침내 욥은 태어났을 때의 자연 환경을 원망하고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욥 27:2)라며 하나님까지 원망하지요. 결국 자기는 의인이고 하나님은 의롭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좋은 중심을 가진 욥이 한 가지만 더하면 당대 의인 중에 의인이 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을 아셨습니다. 행함으로는 누구보다 온전했던 그가 마음 깊이 있는 악의 모양까지도 발견하여 벗어 버리면 진정한 의인으로 나올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이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고 그것을 통해 성결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끄셨지요.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참된 의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욥과 같은 시험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그런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 그릇을 보시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0:13).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욥은 능히 시험을 감당할 줄 아시기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국 욥은 자신도 몰랐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악을 발견하여 버리고 참된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험을 통과하여 좋은 그릇이 되자 하나님께서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3. 진실한 사람을 찾아 축복하시는 하나님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진실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 사람을 발견하면 존귀한 사람으로 높이시고 영화로운 관을 씌워 주시지요. 욥처럼 의로운 사람이 되어 자기의 행사를 돌아보아 항상 하나님 앞에 흠과 티가 없이 깨끗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사란 ‘습관을 좇아 행하는 행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걷든지 무엇을 계획하거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의인을 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욥처럼 어려운 일에 부딪혔다면 끝까지 하나님 앞에 원망하지 않고 의롭게 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감사할 수 있는 진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신앙을 갖기 원하시지요. 이러한 참된 의인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욥은 악의 모양까지도 벗어 버린 온전한 의인으로서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깊은 영적 단계로 들어가 예전보다 갑절이나 축복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갑절의 축복을 받으면 얼마 되지 않지만, 재벌 총수가 갑절의 축복을 받는다면 어마어마하지요. 연단을 받기 전에도 욥은 동방에서 제일가는 거부였으니 그 갑절이면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합당한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에 문제가 있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평, 원망, 탄식, 슬픔, 염려 등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악의 모양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죄악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진정 의로운 마음이 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오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흠도 티도 없는 영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신속하게 응답과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진정한 의인이 되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항상 만나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감사할 수 있는 ( ) 사람을 찾으신다.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신앙을 갖기 원하신다.
2. 욥은 ( )의 모양까지도 벗어 버린 온전한 의인으로서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깊은 영적 단계로 들어가 예전보다 갑절이나 축복을 받았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85~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정직한 사람이란?
정직의 사전적 의미는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마음이 바르고 곧음을 말한다. 영적인 의미는 타인을 속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자신과 약속한 것일지라도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신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쁜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교육목표 : 욥처럼 진정한 의인이 되기 위해 본성 속의 악을 발견하여 벗어 버림으로 영육 간에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드러나면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십니다.
다이아몬드가 원석일 때에는 가치가 적은 돌에 불과하지만 갈고 다듬으면 찬란한 빛을 내는 보석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도 연단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이 되어 축복받을 수 있는지 욥의 신앙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동방에서 가장 큰 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욥 1:3)라 할 만큼 재물이 많았지요. 양이 칠천, 약대가 삼천,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 있었습니다. 한 겨리는 두 마리를 의미하니 소만 해도 천 마리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양과 약대는 그보다 몇 곱절 많았으니 엄청난 재산을 가진 거부였지요.
하나님께서는 욥을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하셨습니다. ‘큰 자’란 사람마다 관점이 달라서 재물이 많고 바르게 쓸 줄 아는 사람, 혹은 지식이 많으며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하거나 사랑과 덕이 많아 존경받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존경할 만하다고 인정하는 큰 자는 단지 눈에 드러난 업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자로 여길 수 있는 마음씀이나 됨됨이가 좋아서 존경할 만한 기본 조건을 갖춘 사람을 말하지요. 마음 됨됨이가 좋은 사람은 시킨 일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많은 것을 포용력 있게 잘 감당합니다.
두루 살필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얼마나 정성을 다하느냐에 따라 마음 그릇의 크고 작은 정도에 차이가 납니다. 모든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이루는 것이 마음 됨됨이를 좋게 하는 길입니다.
욥은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며 큰 자로서 마음 씀씀이가 고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지혜와 지식으로 많은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풍부한 재물을 사람들에게 후히 베풀며 도왔으니 참으로 큰 자라 할 수 있지요.
그 밖에도 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며 행해도 욥만은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잔칫날이 지나면 아침에 일어나 아들들을 부르고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혹시 그들이 잔치 중에 실수하여 죄를 지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욥을 하나님은 순전하다 여기셨습니다. 더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것, 곧 모든 자녀와 재산을 다 거두어 가셨어도 감사하였습니다.
2. 연단을 통해 온전한 의인이 된 욥
욥은 자녀와 재물을 다 잃는 엄청난 일을 당했어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계속하여 시험 환난이 다가왔습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심해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비참한 모습으로 변했지요. 그의 아내는 위로는커녕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비웃으며 저주하지만 욥은 입술로도 범죄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순전한 욥도 통과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는 의롭고 진실했으며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런 고통을 주고 멸시받게 하시는가?” 했지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진정 원하셨던 것은 변함없이 진실하며 악이 없는 온전한 마음이었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지,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지 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욥은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도 감사했지만 시련이 계속되자 마침내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자 깊이 감춰진 악이 드러났지요.
마침내 욥은 태어났을 때의 자연 환경을 원망하고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욥 27:2)라며 하나님까지 원망하지요. 결국 자기는 의인이고 하나님은 의롭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좋은 중심을 가진 욥이 한 가지만 더하면 당대 의인 중에 의인이 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을 아셨습니다. 행함으로는 누구보다 온전했던 그가 마음 깊이 있는 악의 모양까지도 발견하여 벗어 버리면 진정한 의인으로 나올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이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고 그것을 통해 성결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끄셨지요.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참된 의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욥과 같은 시험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그런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 그릇을 보시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0:13).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욥은 능히 시험을 감당할 줄 아시기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국 욥은 자신도 몰랐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악을 발견하여 버리고 참된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험을 통과하여 좋은 그릇이 되자 하나님께서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3. 진실한 사람을 찾아 축복하시는 하나님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진실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 사람을 발견하면 존귀한 사람으로 높이시고 영화로운 관을 씌워 주시지요. 욥처럼 의로운 사람이 되어 자기의 행사를 돌아보아 항상 하나님 앞에 흠과 티가 없이 깨끗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사란 ‘습관을 좇아 행하는 행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걷든지 무엇을 계획하거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의인을 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욥처럼 어려운 일에 부딪혔다면 끝까지 하나님 앞에 원망하지 않고 의롭게 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감사할 수 있는 진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신앙을 갖기 원하시지요. 이러한 참된 의인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욥은 악의 모양까지도 벗어 버린 온전한 의인으로서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깊은 영적 단계로 들어가 예전보다 갑절이나 축복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갑절의 축복을 받으면 얼마 되지 않지만, 재벌 총수가 갑절의 축복을 받는다면 어마어마하지요. 연단을 받기 전에도 욥은 동방에서 제일가는 거부였으니 그 갑절이면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합당한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에 문제가 있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평, 원망, 탄식, 슬픔, 염려 등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악의 모양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죄악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진정 의로운 마음이 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오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흠도 티도 없는 영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신속하게 응답과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진정한 의인이 되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항상 만나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감사할 수 있는 ( ) 사람을 찾으신다.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신앙을 갖기 원하신다.
2. 욥은 ( )의 모양까지도 벗어 버린 온전한 의인으로서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깊은 영적 단계로 들어가 예전보다 갑절이나 축복을 받았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85~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정직한 사람이란?
정직의 사전적 의미는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마음이 바르고 곧음을 말한다. 영적인 의미는 타인을 속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자신과 약속한 것일지라도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신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쁜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2019-09-27
제39과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마태복음 5:10~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5:10~12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10 ㅣ 참고 말씀: 디모데후서 3:12
교육목표 :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승리하여 하늘의 상급과 영광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핍박이란 ‘상대를 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은 어찌하든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핍박하지요.
이러한 핍박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더 잘할 것 같지만 오히려 신앙이 나태해지고 미지근해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믿음의 선진들이 의를 위해 핍박받고 순교할 때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지요.
1.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기까지
로마제국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성도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원형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덤벼들어도 믿음 있는 성도들은 천국 소망 가운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하며 죽어갔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찬송하며 죽어갈까?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기에 죽음도 불사하고 믿음을 지키는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아 성도들이 사자 밥이 되는 피 흘림이 있었기에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천국에서 큰 상으로 갚아 주시며 빛나는 영광 가운데 거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적당히 신앙생활 하면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지켜 술을 마시지 않고 주일을 지키며 진리대로 행하니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핍박을 통해 자신의 신앙이 점검되고 더욱 견고해지기 때문에 진리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핍박을 받는 것일까요?
첫째로, 하나님 일을 이루어갈 때 시기 질투로 인해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누가 잘되는 것을 보면 시기가 일어나 왜곡하여 잘못된 소문을 퍼뜨리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정말 그런가?’ 하며 동조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지요.
예전에 우리 교회도 크게 부흥하니까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훼방하였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몹시 핍박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워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끝까지 의를 지키고 선 가운데 행하며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렸더니 하나님께서는 선한 방법으로 해결하시며 오히려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4절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믿음의 형제끼리 시기하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감정을 품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힘들게 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하신 핍박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십니다. 가령 지혜가 부족한 사람을 더 지혜롭게 하기 위해 핍박을 허락하시기도 하지요. 핍박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한 꾀를 동원하여 잘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정도를 좇는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불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선한 지혜를 주심으로 세상의 악한 지혜를 이기고 더 크게 영광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가 하면 큰 그릇을 만들어 축복을 주시기 위해 핍박을 허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의 시기 질투로 인해 곳곳으로 고달프게 피해 다니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지요.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울왕을 피해 다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지요.
이 외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어 핍박을 허락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도 외에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곳곳으로 피해 흩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파된 것을 볼 수 있지요.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당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루며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뜻에 따라 허락하신 핍박을 잘 받으면 더 훌륭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크게 펼치는 것을 봅니다.
셋째로,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집안 살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식사 준비도 적당히 한다면 가족이 싫어할 것입니다. 또 직장에 다니면서 교회 일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회사 일은 소홀히 한다면 직장 상사나 동료가 좋아하지 않지요. 교회 다니면서도 덕이 되지 않고 손가락질만 받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핍박을 자초하고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여 핍박받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3. 핍박을 이기고 축복을 받으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사람은 왜 핍박을 받는지 깨우쳐서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잘못으로 핍박이 왔다면 당연히 부족한 부분을 고쳐 나가야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는데도 핍박이 온다면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가족이나 친척에게 핍박을 받아 불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진리대로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끝까지 선으로 대할 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지요. 악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핍박을 받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진리 가운데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자신을 심히 핍박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기도하며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지요(눅 23:34). 우리도 선 가운데 용서하며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핍박받는 일이 없도록 자기의 본분을 다하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핍박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통과하여 하늘의 상급과 영광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만일 자신의 ( )으로 핍박이 왔다면 당연히 부족한 부분을 고쳐나가야 핍박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 )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는데도 핍박이 온다면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된다.
2.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핍박을 받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77~8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폴리갑’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자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폴리갑은 한 번만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라 고백하면 살려 주겠다는 로마 관리의 말에 “내 평생 동안 주님이 나를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부인하겠습니까?”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가 되심을 고백함으로 화형당했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꽃도 그의 주를 향한 믿음을 빼앗지 못했다.
교육목표 :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승리하여 하늘의 상급과 영광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핍박이란 ‘상대를 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은 어찌하든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핍박하지요.
이러한 핍박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더 잘할 것 같지만 오히려 신앙이 나태해지고 미지근해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믿음의 선진들이 의를 위해 핍박받고 순교할 때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지요.
1.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기까지
로마제국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성도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원형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덤벼들어도 믿음 있는 성도들은 천국 소망 가운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하며 죽어갔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찬송하며 죽어갈까?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기에 죽음도 불사하고 믿음을 지키는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아 성도들이 사자 밥이 되는 피 흘림이 있었기에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천국에서 큰 상으로 갚아 주시며 빛나는 영광 가운데 거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적당히 신앙생활 하면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지켜 술을 마시지 않고 주일을 지키며 진리대로 행하니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핍박을 통해 자신의 신앙이 점검되고 더욱 견고해지기 때문에 진리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핍박을 받는 것일까요?
첫째로, 하나님 일을 이루어갈 때 시기 질투로 인해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누가 잘되는 것을 보면 시기가 일어나 왜곡하여 잘못된 소문을 퍼뜨리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정말 그런가?’ 하며 동조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지요.
예전에 우리 교회도 크게 부흥하니까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훼방하였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몹시 핍박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워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끝까지 의를 지키고 선 가운데 행하며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렸더니 하나님께서는 선한 방법으로 해결하시며 오히려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4절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믿음의 형제끼리 시기하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감정을 품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힘들게 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하신 핍박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십니다. 가령 지혜가 부족한 사람을 더 지혜롭게 하기 위해 핍박을 허락하시기도 하지요. 핍박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한 꾀를 동원하여 잘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정도를 좇는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불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선한 지혜를 주심으로 세상의 악한 지혜를 이기고 더 크게 영광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가 하면 큰 그릇을 만들어 축복을 주시기 위해 핍박을 허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의 시기 질투로 인해 곳곳으로 고달프게 피해 다니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지요.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울왕을 피해 다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지요.
이 외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어 핍박을 허락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도 외에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곳곳으로 피해 흩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파된 것을 볼 수 있지요.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당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루며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뜻에 따라 허락하신 핍박을 잘 받으면 더 훌륭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크게 펼치는 것을 봅니다.
셋째로,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집안 살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식사 준비도 적당히 한다면 가족이 싫어할 것입니다. 또 직장에 다니면서 교회 일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회사 일은 소홀히 한다면 직장 상사나 동료가 좋아하지 않지요. 교회 다니면서도 덕이 되지 않고 손가락질만 받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핍박을 자초하고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여 핍박받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3. 핍박을 이기고 축복을 받으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사람은 왜 핍박을 받는지 깨우쳐서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잘못으로 핍박이 왔다면 당연히 부족한 부분을 고쳐 나가야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는데도 핍박이 온다면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가족이나 친척에게 핍박을 받아 불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진리대로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끝까지 선으로 대할 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지요. 악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핍박을 받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진리 가운데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자신을 심히 핍박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기도하며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지요(눅 23:34). 우리도 선 가운데 용서하며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핍박받는 일이 없도록 자기의 본분을 다하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핍박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통과하여 하늘의 상급과 영광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만일 자신의 ( )으로 핍박이 왔다면 당연히 부족한 부분을 고쳐나가야 핍박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 )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는데도 핍박이 온다면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된다.
2.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핍박을 받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77~8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폴리갑’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자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폴리갑은 한 번만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라 고백하면 살려 주겠다는 로마 관리의 말에 “내 평생 동안 주님이 나를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부인하겠습니까?”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가 되심을 고백함으로 화형당했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꽃도 그의 주를 향한 믿음을 빼앗지 못했다.
2019-09-20
제38과당세에 완전한 자
창세기 6:5~12
읽을말씀 : 창세기 6:5~12 | 외울말씀 : 창세기 6:5 ㅣ 참고 말씀: 베드로전서 2:1~2
교육목표 : 의인 노아처럼 믿음으로 세상의 헛된 욕심과 모든 죄악을 버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경을 보면 노아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 좋을 대로 살며 우상을 숭배하며 방탕한 삶으로 심히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며 사람의 가치와 본분을 잃어버렸지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심판하셨고 당세에 완전한 자라 인정받은 노아와 그 가족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과연 의인 노아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요?
1. 당세에 완전한 의인 노아
창세기 6장 5~6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혈육 있는 사람의 행위가 패괴하고 강포가 가득하였기 때문이지요. 패괴하다는 것은 부숴지고 무너짐 즉 타락한 것을 말하고, 강포는 완강하고 포악한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도 패괴한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패괴와 강포가 한계를 넘어서면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시며 심판하십니다. 노아 때는 이 세상을 물로, 아브라함 때는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셨지요. 앞으로는 백보좌 심판을 통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 알곡은 천국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지옥불에 던지게 됩니다.
노아 때 심판을 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세에 의인 노아와 가족뿐이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신 말씀대로(창 6:9) 노아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꿋꿋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지키며 진리 안에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온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는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지킴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노아가 의로운 삶의 본을 보였기에 그의 가족들도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노아에게 속해 있었다는 사실이 심판을 면한 가장 큰 이유이지만 그들 역시 노아의 말에 순종하며 하나님 뜻을 좇아 살고자 했습니다. 아무리 노아의 가족이라 해도 노아가 전하는 진리를 따르지 않고 세상을 사랑했다면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사람이 노아와 같은 의인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해 보일 수 있으나 진실하게 법을 준수하고 정직하게 살며 모든 삶에 성실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이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방탕하게 살지 않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천국을 소유하였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내를 내 몸과 같이, 남편을 그리스도와 같이 섬기며, 주 안에서 자녀를 잘 양육하고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의인이 되면 결국 노아와 같이 당세에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여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설령 어려움을 당했다 해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의인을 지키며 구원하시는 하나님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범사에 형통하였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곳에서도 형통했지요. 오히려 합력해 선을 이룸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큰 지진을 일으켜 감옥 문을 여시고 착고도 풀어 주셨습니다.
이방인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제에 힘쓰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니 그와 가족까지 구원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에게 동일하게 환상을 보여 주고 성령의 역사로 서로 만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령을 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해 주셨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의로운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포하고 패괴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 모든 계획이 얼마나 악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결코 지어서는 안 될 죄들을 짓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들지요. 세상 풍조를 버리지 않으면 죄악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신 것도 죄인 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 의롭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죄악이 가득 차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다 해도 우리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구원은 물론 영원한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려면
1)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했습니다. 신령한 젖이란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배우지 않고 깨닫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귀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선에 속하고 악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선에 속하려면 그와 반대되는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악독한 것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바른 소리를 듣고 마음에 담아 심비에 새기고 믿음으로 행해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각종 세상의 유혹에 물들지 않는 온전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고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썩어지지만, 하나님 말씀만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모이기를 힘쓰고 사랑의 떡을 떼며, 구제하고 서로 돌아보아 고아와 과부를 살피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3~4절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즉 외모를 단장하려 하지 말고 속사람을 단장하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9~10절에도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했고, 디모데전서 6장 8절에도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먹는 것, 입는 것, 꾸미는 것, 모든 것이 흠이 되지 않을 정도이면 자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각종 현란한 것들이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고, 탐심을 불러일으키며, 세상에 물들게 하여 사망의 길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3)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말씀합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습니다(벧전 1:16).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고 온전하면 하나님 성품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성령의 열매가 맺힌 정도에 따라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는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믿음으로 세상의 헛된 욕심과 모든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의인이 되어 세세토록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온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는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가 지킴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②
③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65~7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노아의 방주’(창세기 6:14~16)
노아의 방주는 길이 150미터, 폭 25미터, 높이 15미터 정도의 거대한 규모로 지금으로부터 44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대로 설계되었기에 노아의 여덟 식구와 수많은 종류의 동물이 40일간의 홍수를 견뎌내고 일 년 이상 방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방주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을 의미한다.
교육목표 : 의인 노아처럼 믿음으로 세상의 헛된 욕심과 모든 죄악을 버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경을 보면 노아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 좋을 대로 살며 우상을 숭배하며 방탕한 삶으로 심히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며 사람의 가치와 본분을 잃어버렸지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심판하셨고 당세에 완전한 자라 인정받은 노아와 그 가족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과연 의인 노아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요?
1. 당세에 완전한 의인 노아
창세기 6장 5~6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혈육 있는 사람의 행위가 패괴하고 강포가 가득하였기 때문이지요. 패괴하다는 것은 부숴지고 무너짐 즉 타락한 것을 말하고, 강포는 완강하고 포악한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도 패괴한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패괴와 강포가 한계를 넘어서면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시며 심판하십니다. 노아 때는 이 세상을 물로, 아브라함 때는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셨지요. 앞으로는 백보좌 심판을 통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 알곡은 천국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지옥불에 던지게 됩니다.
노아 때 심판을 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세에 의인 노아와 가족뿐이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신 말씀대로(창 6:9) 노아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꿋꿋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지키며 진리 안에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온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는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지킴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노아가 의로운 삶의 본을 보였기에 그의 가족들도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노아에게 속해 있었다는 사실이 심판을 면한 가장 큰 이유이지만 그들 역시 노아의 말에 순종하며 하나님 뜻을 좇아 살고자 했습니다. 아무리 노아의 가족이라 해도 노아가 전하는 진리를 따르지 않고 세상을 사랑했다면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사람이 노아와 같은 의인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해 보일 수 있으나 진실하게 법을 준수하고 정직하게 살며 모든 삶에 성실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이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방탕하게 살지 않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천국을 소유하였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내를 내 몸과 같이, 남편을 그리스도와 같이 섬기며, 주 안에서 자녀를 잘 양육하고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의인이 되면 결국 노아와 같이 당세에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여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설령 어려움을 당했다 해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의인을 지키며 구원하시는 하나님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범사에 형통하였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곳에서도 형통했지요. 오히려 합력해 선을 이룸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큰 지진을 일으켜 감옥 문을 여시고 착고도 풀어 주셨습니다.
이방인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제에 힘쓰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니 그와 가족까지 구원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에게 동일하게 환상을 보여 주고 성령의 역사로 서로 만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령을 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해 주셨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의로운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포하고 패괴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 모든 계획이 얼마나 악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결코 지어서는 안 될 죄들을 짓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들지요. 세상 풍조를 버리지 않으면 죄악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신 것도 죄인 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 의롭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죄악이 가득 차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다 해도 우리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구원은 물론 영원한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려면
1)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했습니다. 신령한 젖이란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배우지 않고 깨닫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귀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선에 속하고 악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선에 속하려면 그와 반대되는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악독한 것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바른 소리를 듣고 마음에 담아 심비에 새기고 믿음으로 행해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각종 세상의 유혹에 물들지 않는 온전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고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썩어지지만, 하나님 말씀만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모이기를 힘쓰고 사랑의 떡을 떼며, 구제하고 서로 돌아보아 고아와 과부를 살피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3~4절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즉 외모를 단장하려 하지 말고 속사람을 단장하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9~10절에도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했고, 디모데전서 6장 8절에도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먹는 것, 입는 것, 꾸미는 것, 모든 것이 흠이 되지 않을 정도이면 자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각종 현란한 것들이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고, 탐심을 불러일으키며, 세상에 물들게 하여 사망의 길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3)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말씀합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습니다(벧전 1:16).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고 온전하면 하나님 성품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성령의 열매가 맺힌 정도에 따라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는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믿음으로 세상의 헛된 욕심과 모든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의인이 되어 세세토록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온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는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가 지킴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②
③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65~7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노아의 방주’(창세기 6:14~16)
노아의 방주는 길이 150미터, 폭 25미터, 높이 15미터 정도의 거대한 규모로 지금으로부터 44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대로 설계되었기에 노아의 여덟 식구와 수많은 종류의 동물이 40일간의 홍수를 견뎌내고 일 년 이상 방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방주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을 의미한다.
2019-09-13
제37과요동하지 말라
사사기 9:7~15
읽을말씀 : 사사기 9:7~15 | 외울말씀 : 잠언 4:27 ㅣ 참고 말씀: 에베소서 6:5~7
교육목표 : 참된 의인이 되기 위해 영적으로 요동치 않고 자기 분수와 위치를 지키며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약방의 감초는 뿌리에 단맛이 있어서 다른 한약재와 달리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단맛이 비위를 돕고 다른 약재의 작용을 부드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초라도 환자의 증상에 따라 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감초는 체내에 염분과 수분을 축적시켜서 고혈압이나 심장병에는 좋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한약재 중에도 들어가야 할 곳과 들어가서는 안 될 곳이 있습니다. 들어가야 할 곳에 들어가면 좋은 결과를 얻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부작용이나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1. 요동하지 않은 나무들과 가시나무 비유
사사기 9장에는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 세겜 사람들을 향해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의 비유를 들어 외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미디안 족속에게 7년간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3백 명의 군사로 수많은 미디안 사람들을 물리쳐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자신들을 다스려 줄 것을 요청하지만 그는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하며 거절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죽은 뒤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왕이 되려는 욕심으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사람들을 회유하여 자금을 마련한 후 그 돈으로 불량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다음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의 이복형제 칠십 명을 한꺼번에 몰살하였습니다. 다행히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만은 몰래 숨어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등에 업고 왕이 되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요담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세겜 남쪽에 있는 그리심산 꼭대기로 올라가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가시나무를 비유하여 세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나무들이 그들의 왕을 뽑으려고 할 때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요동하지 않고 전부 왕이 되는 것을 사양하였지만, 아무 쓸모없는 가시나무만 자기 분수도 모른 채 교만하여 왕이 되고자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곧 기드온과 그의 아들들은 백성의 요청에도 왕위를 탐내지 않았지만 오히려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악한 방법으로 왕이 된 것을 비유한 것이지요.
물론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의 보응이 임하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 사람들은 도리어 아비멜렉의 손에 진멸되었고, 아비멜렉 역시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머리를 맞아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데 이에서 벗어나니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2. 각자 위치에서 지켜야 할 도리
모든 사람은 자기 위치에서 해야 할 일과 도리가 있습니다.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웃어른을 공경하는 등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고 남편 혹은 아내로서의 도리가 있습니다.
또한 주의 종으로서 도리가 있고, 양 떼로서의 도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의 종이라면 성도들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전히 진리 안에 살도록 깨우쳐 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범사에 천국 소망 가운데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양 떼 편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변화되어 의롭고 정결한 사람이 되며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이 도리이지요.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진리 안에서 바르게 양육하고, 자녀 역시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엡 6장).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머리로 섬기고 가정을 돌아보며,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고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해야 하지요(엡 5장).
하나님께서는 상하 관계 도리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아랫사람에 대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엡 6:5~7).
그리고 윗사람에 대해서는 골로새서 4장 1절에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며, 참된 의인이 되려면 자신의 도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3. 요동하지 않는 신앙생활
자신의 위치와 도리를 지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교회 모든 조직내에서 꼭 필요한 사항입니다. 몸의 지체 중에 어떤 것은 소중하고 어떤 것은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의 사명을 소중히 여기며 주어진 일에 충성할 때 모든 일을 화평 가운데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한 몸을 이루는 소중한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서로 쓸데없다하거나 다른 지체를 마음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며 혹여 상대에게 허물이 있다 해도 사랑으로 덮어 주고 누가 칭찬을 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누가 아파하면 기도와 금식으로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감람나무는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 해도 그 자리를 사양하며 전혀 요동치 않습니다. 무화과나무도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하였고,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하면서 왕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분수를 모르는 가시나무만큼은 왕이 되라는 요청에 요동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자신을 알고 본분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분야가 다 소중합니다. 다만 그 분야에서 어떻게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느냐가 중요하며 행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동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잘 지킴으로 모든 것이 아름답고 온전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4. 기타 요동하지 말아야 할 분야들
첫째, 믿음의 반석에 서기까지는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반석에 서면 어떤 시험 환난이 오더라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곧장 그 길을 갈 수 있고, 원수 마귀 사단의 유혹을 받지 않고 항상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도할 때에도 요동하지 말고 습관을 좇아 해야 합니다. 충만하고 기쁠 때에는 기도하고, 피곤하고 졸리면 기도를 쉰다거나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다가 시험 환난이 오면 그때서야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되 응답을 받기 위해서도 요동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약 1:6~8).
셋째, 사랑하는 데에도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사랑했으면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으니 우리도 요동하거나 변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중심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가 나옵니다.
넷째, 충성과 봉사하는 데에도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결코 요동하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사자 굴이나 풀무 불에 던져진다 해도 진리를 지켰지요. 우리도 성결한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갖기까지 요동하지 말고 사명 감당을 잘하며 열심히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요동하여 자기 형제를 죽이고 악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아비멜렉을 요담은 무엇에 비유하였을까요?
2.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요동하지 말아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55~6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드온’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사사이다.
바알제단을 뒤엎고 아세라상을 찍어 버린 계기로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위해 용사를 모집하자 3만 2천 명이 자원하게 된다. 이때 기드온은 물을 손으로 떠서 핥아먹는 3백 명만 선발하여 전쟁에 나간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적진에서 한 미디안 군사가 그 동료에게 꿈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함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과 용기를 주셨다. 마침내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단 3백 명으로 13만 5천 명을 물리쳐 대승하였고,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교육목표 : 참된 의인이 되기 위해 영적으로 요동치 않고 자기 분수와 위치를 지키며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약방의 감초는 뿌리에 단맛이 있어서 다른 한약재와 달리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단맛이 비위를 돕고 다른 약재의 작용을 부드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초라도 환자의 증상에 따라 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감초는 체내에 염분과 수분을 축적시켜서 고혈압이나 심장병에는 좋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한약재 중에도 들어가야 할 곳과 들어가서는 안 될 곳이 있습니다. 들어가야 할 곳에 들어가면 좋은 결과를 얻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부작용이나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1. 요동하지 않은 나무들과 가시나무 비유
사사기 9장에는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 세겜 사람들을 향해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의 비유를 들어 외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미디안 족속에게 7년간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3백 명의 군사로 수많은 미디안 사람들을 물리쳐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자신들을 다스려 줄 것을 요청하지만 그는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하며 거절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죽은 뒤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왕이 되려는 욕심으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사람들을 회유하여 자금을 마련한 후 그 돈으로 불량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다음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의 이복형제 칠십 명을 한꺼번에 몰살하였습니다. 다행히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만은 몰래 숨어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등에 업고 왕이 되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요담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세겜 남쪽에 있는 그리심산 꼭대기로 올라가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가시나무를 비유하여 세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나무들이 그들의 왕을 뽑으려고 할 때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요동하지 않고 전부 왕이 되는 것을 사양하였지만, 아무 쓸모없는 가시나무만 자기 분수도 모른 채 교만하여 왕이 되고자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곧 기드온과 그의 아들들은 백성의 요청에도 왕위를 탐내지 않았지만 오히려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악한 방법으로 왕이 된 것을 비유한 것이지요.
물론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의 보응이 임하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 사람들은 도리어 아비멜렉의 손에 진멸되었고, 아비멜렉 역시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머리를 맞아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데 이에서 벗어나니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2. 각자 위치에서 지켜야 할 도리
모든 사람은 자기 위치에서 해야 할 일과 도리가 있습니다.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웃어른을 공경하는 등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고 남편 혹은 아내로서의 도리가 있습니다.
또한 주의 종으로서 도리가 있고, 양 떼로서의 도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의 종이라면 성도들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전히 진리 안에 살도록 깨우쳐 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범사에 천국 소망 가운데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양 떼 편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변화되어 의롭고 정결한 사람이 되며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이 도리이지요.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진리 안에서 바르게 양육하고, 자녀 역시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엡 6장).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머리로 섬기고 가정을 돌아보며,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고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해야 하지요(엡 5장).
하나님께서는 상하 관계 도리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아랫사람에 대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엡 6:5~7).
그리고 윗사람에 대해서는 골로새서 4장 1절에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며, 참된 의인이 되려면 자신의 도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3. 요동하지 않는 신앙생활
자신의 위치와 도리를 지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교회 모든 조직내에서 꼭 필요한 사항입니다. 몸의 지체 중에 어떤 것은 소중하고 어떤 것은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의 사명을 소중히 여기며 주어진 일에 충성할 때 모든 일을 화평 가운데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한 몸을 이루는 소중한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서로 쓸데없다하거나 다른 지체를 마음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며 혹여 상대에게 허물이 있다 해도 사랑으로 덮어 주고 누가 칭찬을 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누가 아파하면 기도와 금식으로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감람나무는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 해도 그 자리를 사양하며 전혀 요동치 않습니다. 무화과나무도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하였고,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하면서 왕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분수를 모르는 가시나무만큼은 왕이 되라는 요청에 요동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자신을 알고 본분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분야가 다 소중합니다. 다만 그 분야에서 어떻게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느냐가 중요하며 행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동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잘 지킴으로 모든 것이 아름답고 온전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4. 기타 요동하지 말아야 할 분야들
첫째, 믿음의 반석에 서기까지는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반석에 서면 어떤 시험 환난이 오더라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곧장 그 길을 갈 수 있고, 원수 마귀 사단의 유혹을 받지 않고 항상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도할 때에도 요동하지 말고 습관을 좇아 해야 합니다. 충만하고 기쁠 때에는 기도하고, 피곤하고 졸리면 기도를 쉰다거나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다가 시험 환난이 오면 그때서야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되 응답을 받기 위해서도 요동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약 1:6~8).
셋째, 사랑하는 데에도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사랑했으면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으니 우리도 요동하거나 변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중심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가 나옵니다.
넷째, 충성과 봉사하는 데에도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결코 요동하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사자 굴이나 풀무 불에 던져진다 해도 진리를 지켰지요. 우리도 성결한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갖기까지 요동하지 말고 사명 감당을 잘하며 열심히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요동하여 자기 형제를 죽이고 악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아비멜렉을 요담은 무엇에 비유하였을까요?
2.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요동하지 말아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55~6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드온’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사사이다.
바알제단을 뒤엎고 아세라상을 찍어 버린 계기로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위해 용사를 모집하자 3만 2천 명이 자원하게 된다. 이때 기드온은 물을 손으로 떠서 핥아먹는 3백 명만 선발하여 전쟁에 나간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적진에서 한 미디안 군사가 그 동료에게 꿈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함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과 용기를 주셨다. 마침내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단 3백 명으로 13만 5천 명을 물리쳐 대승하였고,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2019-09-12
제0과추석 명절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가을에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드린 절기이지요.
한가위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308장 ---------------------- 다 같이
1.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 빛에 향기 진동하도다
2.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심히 적으니
열심 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3. 먼동 틀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4. 거둬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 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후렴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기회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합시다 아멘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18 -------------------- 인도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설 교 --------------------- 화목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어느 노부부가 사소한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감정이 상해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지요. 식사 때가 되어 할아버지에게 상은 차려 주었지만 한쪽에 앉아 말없이 바느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내가 침묵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지요. 그러다가 묘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옷장을 열고 무엇인가 열심히 찾기 시작했습니다. 또 여기저기 서랍을 뒤지면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못 본 척 했습니다. 그런데 옷장 속의 옷들과 서랍 안의 물건들까지 다 꺼내 놓으니 왜 그러는지 궁금해져 “도대체 뭘 찾는데 그래요?” 하고 퉁명스레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지 뭐야. 이제야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구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이제 화 풀어요.” 하며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이내 마음이 풀어져 “제가 잘못했어요.” 하며 다시 웃음꽃이 피어났지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그러면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두와 화평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둘째로,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의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며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고,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화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가장 사랑이 넘치고 화목해야 할 곳이지요. 모두가 조금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해 준다면 상하고 얽혔던 감정도 쉽게 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주장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섬기고 희생함으로 주 안에서 화평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가정, 학교, 직장, 사업터, 일터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가을에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드린 절기이지요.
한가위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308장 ---------------------- 다 같이
1.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 빛에 향기 진동하도다
2.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심히 적으니
열심 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3. 먼동 틀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4. 거둬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 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후렴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기회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합시다 아멘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18 -------------------- 인도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설 교 --------------------- 화목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어느 노부부가 사소한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감정이 상해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지요. 식사 때가 되어 할아버지에게 상은 차려 주었지만 한쪽에 앉아 말없이 바느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내가 침묵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지요. 그러다가 묘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옷장을 열고 무엇인가 열심히 찾기 시작했습니다. 또 여기저기 서랍을 뒤지면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못 본 척 했습니다. 그런데 옷장 속의 옷들과 서랍 안의 물건들까지 다 꺼내 놓으니 왜 그러는지 궁금해져 “도대체 뭘 찾는데 그래요?” 하고 퉁명스레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지 뭐야. 이제야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구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이제 화 풀어요.” 하며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이내 마음이 풀어져 “제가 잘못했어요.” 하며 다시 웃음꽃이 피어났지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그러면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두와 화평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둘째로,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의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며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고,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화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가장 사랑이 넘치고 화목해야 할 곳이지요. 모두가 조금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해 준다면 상하고 얽혔던 감정도 쉽게 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주장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섬기고 희생함으로 주 안에서 화평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가정, 학교, 직장, 사업터, 일터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19-09-06
제36과순종
사무엘상 15:22~23
읽을말씀 : 사무엘상 15:22~23 | 외울말씀 : 사무엘상 15:22 ㅣ 참고 말씀: 로마서 10:10
교육목표 : 믿음을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는 힘이 바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은 마지못해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 명령을 기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온전히 순종하는 차원이 되면 사람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행하게 되고 어떠한 환경도 초월하게 됩니다. 참된 의인은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1. 순종은 의인이 되기 위한 관문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마음을 할례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버리라’, ‘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은 버리고 하지 않으며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들을 지켜 행하니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의에 이르는 것이지요. 즉 성결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 입술로 시인할 때 그것이 참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할 때라야 의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미워하지 말라’ 하셨으니 미움을 버리고, ‘시기하지 말라’ 하셨으니 시기하지 않으며,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으니 원수도 사랑하며 하나님 말씀을 행함으로 순종하는 만큼 의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믿어 순종이 온전히 이루어질수록 참된 의인의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2. 질서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 축복
세상에는 주종 관계나 조직 사회와 같이 순종이 잘 이루어져야 할 분야가 많습니다. 질서 안에서 얼마나 순종이 잘 되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부모는 자녀를 주 안에서 올바르고 지혜롭게 잘 자라도록 가르쳐야 하고, 자녀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빗나가지 않아야 하지요. 자녀가 부모님 말씀도 듣지 않고 늘 사고만 친다면 그 가정은 불행과 슬픔,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사회에서도 귀히 쓰임을 받는다면 부모는 더할 나위없이 기쁠 것입니다.
사제지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제자가 깍듯이 스승을 존중하며 배운 것을 바로 깨우치고, 잘 양식 삼아 활용하며 타의 모범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회사 사장 역시 잘 순종하며, 성실하고 진실하며 지혜로워서 회사 발전에 기여하는 유능한 직원을 좋아하지요. 이처럼 질서를 좇아 순종할 때 모든 것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비진리를 좇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 나가는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생명보다 귀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였을 때,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기쁘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이 무척 사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3.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반면 사울왕처럼 불순종을 거듭하여 하나님께 싫어버린 바 된 사람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그는 자기 생각 가운데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도 불순종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아말렉의 아각 왕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왔고, 기름진 양과 소는 남기고 가치 없고 천한 것만 멸하였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으로 인해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 받아 왕위가 다윗에게 넘어가고 말지요.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하며 사울왕을 엄히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15:22).
그러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자기의 생각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과는 반대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낮아져라 그러면 높아진다, 죽어져라 그러면 산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어 줘라 등의 말씀들을 보면 우리 생각과는 너무나 맞지 않지요.
이러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즉 내가 속한 가정이나 직장, 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의 마음도 맞춰 주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생각에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4. 순종하는 의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하는데 갑자기 집안에 큰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아이구, 내 집에 문제가 생겼으니 어떻게 가나?’ 하고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작정했으니 가자.’ 하고 순종하면 그 뒷일은 하나님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자기 생각이 앞서게 되면 불순종이 나올뿐더러 부부나 가족,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맞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넓은 하나님 마음을 어찌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7~8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지만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므로 순종치 않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오직 순종함으로 의인이 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지요. 사르밧 과부의 경우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가뭄이 매우 심하여 한 번 먹을 양식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것으로 자기를 위해 떡 한 조각을 만들어 오라고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약속하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합니다(왕상 17:14).
엘리야의 요청은 보통 사람이 순종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엘리야가 약속한 대로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양식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순종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생각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참된 의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믿음을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는 힘이 바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은 마지못해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 명령을 기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온전히 순종하는 차원이 되면 사람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행하게 되고 어떠한 환경도 초월하게 됩니다. 참된 의인은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1. 순종은 의인이 되기 위한 관문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마음을 할례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버리라’, ‘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은 버리고 하지 않으며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들을 지켜 행하니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의에 이르는 것이지요. 즉 성결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 입술로 시인할 때 그것이 참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할 때라야 의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미워하지 말라’ 하셨으니 미움을 버리고, ‘시기하지 말라’ 하셨으니 시기하지 않으며,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으니 원수도 사랑하며 하나님 말씀을 행함으로 순종하는 만큼 의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믿어 순종이 온전히 이루어질수록 참된 의인의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2. 질서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 축복
세상에는 주종 관계나 조직 사회와 같이 순종이 잘 이루어져야 할 분야가 많습니다. 질서 안에서 얼마나 순종이 잘 되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부모는 자녀를 주 안에서 올바르고 지혜롭게 잘 자라도록 가르쳐야 하고, 자녀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빗나가지 않아야 하지요. 자녀가 부모님 말씀도 듣지 않고 늘 사고만 친다면 그 가정은 불행과 슬픔,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사회에서도 귀히 쓰임을 받는다면 부모는 더할 나위없이 기쁠 것입니다.
사제지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제자가 깍듯이 스승을 존중하며 배운 것을 바로 깨우치고, 잘 양식 삼아 활용하며 타의 모범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회사 사장 역시 잘 순종하며, 성실하고 진실하며 지혜로워서 회사 발전에 기여하는 유능한 직원을 좋아하지요. 이처럼 질서를 좇아 순종할 때 모든 것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비진리를 좇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 나가는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생명보다 귀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였을 때,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기쁘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이 무척 사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3.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반면 사울왕처럼 불순종을 거듭하여 하나님께 싫어버린 바 된 사람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그는 자기 생각 가운데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도 불순종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아말렉의 아각 왕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왔고, 기름진 양과 소는 남기고 가치 없고 천한 것만 멸하였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으로 인해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 받아 왕위가 다윗에게 넘어가고 말지요.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하며 사울왕을 엄히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15:22).
그러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자기의 생각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과는 반대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낮아져라 그러면 높아진다, 죽어져라 그러면 산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어 줘라 등의 말씀들을 보면 우리 생각과는 너무나 맞지 않지요.
이러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즉 내가 속한 가정이나 직장, 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의 마음도 맞춰 주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생각에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4. 순종하는 의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하는데 갑자기 집안에 큰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아이구, 내 집에 문제가 생겼으니 어떻게 가나?’ 하고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작정했으니 가자.’ 하고 순종하면 그 뒷일은 하나님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자기 생각이 앞서게 되면 불순종이 나올뿐더러 부부나 가족,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맞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넓은 하나님 마음을 어찌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7~8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지만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므로 순종치 않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오직 순종함으로 의인이 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지요. 사르밧 과부의 경우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가뭄이 매우 심하여 한 번 먹을 양식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것으로 자기를 위해 떡 한 조각을 만들어 오라고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약속하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합니다(왕상 17:14).
엘리야의 요청은 보통 사람이 순종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엘리야가 약속한 대로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양식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순종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생각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참된 의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시기 바랍니다.
2019-08-30
제35과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창세기 22:1~13
읽을말씀 : 창세기 22:1~13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19 ㅣ 참고 말씀: 에스더 4:16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상대를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눈빛이나 몸짓만 보아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설령 이해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해도 오해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신하는 경우는 친한 것 같아도 사소한 일로도 감정이 쉽게 상하고 결국 갈라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도 얼마나 진실함으로 신뢰를 쌓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1. 자신의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신뢰 관계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남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할 때도 있고, 부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만일 그 일이 악한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니 결코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일을 부탁받았을 때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도 아끼지 않고 도와주며 해결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인물로는 에스더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으로서 페르시아 왕후가 된 에스더에게 사촌 모르드개가 부탁을 합니다. 악한 하만이 자기 민족(유다)을 말살하려고 하니 왕에게 나가 간청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선뜻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왕 앞에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30일이나 되었고,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다시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하며 왕 앞에 나가기를 권면합니다. 이에 에스더는 삼일 금식을 하고 민족을 살리고자 자신이 죽을 각오로 왕 앞에 나가 결국 멸절 위기의 민족을 구합니다. 에스더가 선 가운데 자기 유익이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모르드개의 청을 들어주었기에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으며 그 결과도 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부모 없는 에스더를 딸처럼 양육했고, 에스더 역시 아버지처럼 따르며 신뢰했기에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부탁까지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중심을 소유한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 온전케 하시기 위해 시험을 하십니다. 그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목적지를 알려 주지 않고 앞으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만 명하시지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몰랐지만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도 대지 않고 지시하신 땅으로 떠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보니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은 의심없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신 약속이 무색하리만큼 그 땅에 심한 기근이 들어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믿음으로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왔건만 설상가상으로 애굽 왕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했을 법도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니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셨고, 바로왕은 즉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오히려 이 일로 아브라함은 육축과 은금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은 이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 임합니다.
3.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어드린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니 함께한 조카 롯까지 복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가축이 어찌나 많았던지 목초지와 물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지요. 이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줍니다. 그 후에도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구해 오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양육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뭇별처럼 네 자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미 자신이나 아내가 나이 많아 자식을 낳을 수 없지만 결코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기뻐하시며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되도록 후사가 생기지 않자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자녀를 얻도록 요구한 결과, 하갈과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해에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인 이삭을 100세에 얻었습니다.
어느 날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하지요.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므로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 하시며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정과 욕심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면 오직 순종했던 것입니다.
4.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이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히 11:19).
아브라함은 바로 순종하여 아침 일찍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으로 갔습니다. 모든 번제 준비를 마치고 이삭을 결박하여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다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는 것이었지요.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이때를 기다리고 대답한 건 아닐까?”라고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데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멈추라고 하시지는 않을까?”라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순종하여 칼로 내리치려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과 순종을 내보임으로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경외함을 온전히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지예정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시험을 통과할지도 다 아셨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심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시험하신 것은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원수 마귀 사단 앞에서도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신앙이 분명히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인이 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으며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상대를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눈빛이나 몸짓만 보아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설령 이해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해도 오해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신하는 경우는 친한 것 같아도 사소한 일로도 감정이 쉽게 상하고 결국 갈라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도 얼마나 진실함으로 신뢰를 쌓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1. 자신의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신뢰 관계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남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할 때도 있고, 부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만일 그 일이 악한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니 결코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일을 부탁받았을 때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도 아끼지 않고 도와주며 해결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인물로는 에스더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으로서 페르시아 왕후가 된 에스더에게 사촌 모르드개가 부탁을 합니다. 악한 하만이 자기 민족(유다)을 말살하려고 하니 왕에게 나가 간청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선뜻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왕 앞에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30일이나 되었고,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다시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하며 왕 앞에 나가기를 권면합니다. 이에 에스더는 삼일 금식을 하고 민족을 살리고자 자신이 죽을 각오로 왕 앞에 나가 결국 멸절 위기의 민족을 구합니다. 에스더가 선 가운데 자기 유익이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모르드개의 청을 들어주었기에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으며 그 결과도 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부모 없는 에스더를 딸처럼 양육했고, 에스더 역시 아버지처럼 따르며 신뢰했기에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부탁까지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중심을 소유한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 온전케 하시기 위해 시험을 하십니다. 그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목적지를 알려 주지 않고 앞으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만 명하시지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몰랐지만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도 대지 않고 지시하신 땅으로 떠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보니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은 의심없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신 약속이 무색하리만큼 그 땅에 심한 기근이 들어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믿음으로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왔건만 설상가상으로 애굽 왕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했을 법도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니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셨고, 바로왕은 즉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오히려 이 일로 아브라함은 육축과 은금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은 이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 임합니다.
3.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어드린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니 함께한 조카 롯까지 복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가축이 어찌나 많았던지 목초지와 물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지요. 이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줍니다. 그 후에도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구해 오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양육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뭇별처럼 네 자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미 자신이나 아내가 나이 많아 자식을 낳을 수 없지만 결코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기뻐하시며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되도록 후사가 생기지 않자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자녀를 얻도록 요구한 결과, 하갈과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해에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인 이삭을 100세에 얻었습니다.
어느 날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하지요.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므로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 하시며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정과 욕심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면 오직 순종했던 것입니다.
4.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이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히 11:19).
아브라함은 바로 순종하여 아침 일찍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으로 갔습니다. 모든 번제 준비를 마치고 이삭을 결박하여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다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는 것이었지요.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이때를 기다리고 대답한 건 아닐까?”라고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데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멈추라고 하시지는 않을까?”라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순종하여 칼로 내리치려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과 순종을 내보임으로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경외함을 온전히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지예정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시험을 통과할지도 다 아셨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심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시험하신 것은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원수 마귀 사단 앞에서도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신앙이 분명히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인이 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으며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019-08-23
제34과네 믿은 대로 되어라
마태복음 8:13
읽을말씀 : 마태복음 8:1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8:13 ㅣ 참고 말씀: 요한일서 3:21~22
교육목표 : 주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백부장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과 환난이 왔을 때나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것 같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였기에 아무리 어렵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응답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1. 근본의 소리에 순종하는 모든 피조물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니 식물이 창조되었고,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하시니 해와 달과 별들이 창조되었습니다.
이처럼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근본의 소리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합니다. 오늘날 ‘음성 인식 장치’가 특정한 음성에만 반응하여 작동하는 것처럼, 천지 만물에도 근본의 소리가 배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도 근본의 소리를 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하신 대로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였지요. 하물며 귀가 있어 들을 수 있고 이성도 있어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발하신 근본의 소리에 즉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아 비진리인 어둠의 일들을 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사람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 지어져 하나님 말씀인 진리만 듣고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는 자유 의지 속에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봇처럼 무조건 복종하는 자녀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유 의지를 지닌 사람으로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사단의 꾐에 넘어가 불순종의 죄를 짓고 말았지요.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은 결국 죄의 종,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어 악한 영들이 사주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했습니다.
마침내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할뿐더러 죄에 죄를 더해 가며 사망, 곧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즉 속죄 제물로 죽으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근본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을 지닌 백부장의 믿음
이스라엘에 파견된 로마 군대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등 수많은 사람이 각색 질병을 치료받은 소문을 듣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베푸신 예수님에 관한 반응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자기적인 신앙의 단단한 틀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정죄하는 부류도 있었지요.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 제사장, 장로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큰 선지자 정도로만 믿고 따르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마음으로 깨닫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었습니다. 바로 백부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로마 사람인데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4. 시공을 초월한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
마태복음 8장 6절 이하를 보면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근본의 소리를 발하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백부장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나 형제, 자녀가 아닌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예수님 앞에 직접 찾아왔으니 예수님께서 어찌 감동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더구나 중풍은 의술로도 치료하기 어려운 중한 질병입니다. 몸의 일부분이 마비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질병을 앓는 기간이 오래되면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변함없이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 주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가족이라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하인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했기에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인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 간구하는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 하며 중심에서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수고롭게 자신의 집에까지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명하시면 하인이 치료받을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하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하고자 할 자세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며 그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시고 칭찬하셨습니다(마 8:10).
그리고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곧바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니 백부장의 믿음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즉시 응답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하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을 버리면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에게는 다만 말씀만으로도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면서도 예수님께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며 온전히 순종할 자세를 지녔기에 즉시 시공을 초월하여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 )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한다.
2.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신 이유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온전히 ( )했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무엇을 명해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알고 넘어갑시다!
‘백부장’
1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 군대는 군단들로 조직되었는데 각 군단은 6,000명 정원의 남자들로 구성되었고, 각 군단은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60명의 백부장과 더불어 6개의 보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백부장은 높은 보수를 받았으며 로마 사회에서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근무 연한은 20년이었지만 본인이 원하면 군대에 더 머물 수도 있었다.
교육목표 : 주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백부장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과 환난이 왔을 때나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것 같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였기에 아무리 어렵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응답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1. 근본의 소리에 순종하는 모든 피조물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니 식물이 창조되었고,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하시니 해와 달과 별들이 창조되었습니다.
이처럼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근본의 소리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합니다. 오늘날 ‘음성 인식 장치’가 특정한 음성에만 반응하여 작동하는 것처럼, 천지 만물에도 근본의 소리가 배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도 근본의 소리를 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하신 대로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였지요. 하물며 귀가 있어 들을 수 있고 이성도 있어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발하신 근본의 소리에 즉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아 비진리인 어둠의 일들을 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사람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 지어져 하나님 말씀인 진리만 듣고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는 자유 의지 속에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봇처럼 무조건 복종하는 자녀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유 의지를 지닌 사람으로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사단의 꾐에 넘어가 불순종의 죄를 짓고 말았지요.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은 결국 죄의 종,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어 악한 영들이 사주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했습니다.
마침내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할뿐더러 죄에 죄를 더해 가며 사망, 곧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즉 속죄 제물로 죽으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근본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을 지닌 백부장의 믿음
이스라엘에 파견된 로마 군대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등 수많은 사람이 각색 질병을 치료받은 소문을 듣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베푸신 예수님에 관한 반응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자기적인 신앙의 단단한 틀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정죄하는 부류도 있었지요.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 제사장, 장로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큰 선지자 정도로만 믿고 따르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마음으로 깨닫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었습니다. 바로 백부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로마 사람인데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4. 시공을 초월한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
마태복음 8장 6절 이하를 보면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근본의 소리를 발하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백부장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나 형제, 자녀가 아닌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예수님 앞에 직접 찾아왔으니 예수님께서 어찌 감동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더구나 중풍은 의술로도 치료하기 어려운 중한 질병입니다. 몸의 일부분이 마비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질병을 앓는 기간이 오래되면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변함없이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 주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가족이라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하인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했기에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인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 간구하는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 하며 중심에서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수고롭게 자신의 집에까지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명하시면 하인이 치료받을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하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하고자 할 자세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며 그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시고 칭찬하셨습니다(마 8:10).
그리고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곧바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니 백부장의 믿음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즉시 응답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하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을 버리면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에게는 다만 말씀만으로도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면서도 예수님께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며 온전히 순종할 자세를 지녔기에 즉시 시공을 초월하여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 )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한다.
2.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신 이유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온전히 ( )했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무엇을 명해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알고 넘어갑시다!
‘백부장’
1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 군대는 군단들로 조직되었는데 각 군단은 6,000명 정원의 남자들로 구성되었고, 각 군단은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60명의 백부장과 더불어 6개의 보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백부장은 높은 보수를 받았으며 로마 사회에서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근무 연한은 20년이었지만 본인이 원하면 군대에 더 머물 수도 있었다.
2019-08-16
제33과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누가복음 18:41
읽을말씀 : 누가복음 18:41 | 외울말씀 : 예레미야 33:3 l 참고 말씀:누가복음 22:44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소원을 무엇이든지 고백하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신속히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더라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기만 한다면 아무리 크고 어려워 보이는 문제도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소리를 발하시자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자 그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자 그가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을 붙좇았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근본의 소리’라고 합니다.
‘근본의 소리’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근본의 소리로 하나님의 응답을 신속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첫째, 예수님을 중심에서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을 나타내며 말씀을 확증하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나 뛰고 문둥병이 치료되었으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귀신이 나가는 등 갖가지 질병과 연약한 사람을 고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은 널리 퍼졌고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윗의 자손에게서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는 분임을 마음 중심에서 믿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는 비록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가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처럼 마음이 선했기에 소문을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둘째,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은 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을까요? 창세기 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시조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죄가 들어오고 육의 사람으로 전락하여 땀 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기 위해서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즉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수고를 해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했고,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하였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에 맞도록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문제를 응답받고자 한다면 어떠해야겠습니까. 따라서 소경이 응답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구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소리 내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도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간절한 심정으로 공의에 맞게 구하였지요. 따라서 소경이 눈을 뜰 수 있었던 세 번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다는 점입니다. 만일 소경이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을 때 기분이 상하여 낙심해 버렸다면 결코 응답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했기에 거기에 굴하지 않고 간절히 부르짖어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하여 돌아가 버리거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변함없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넷째, 겉옷을 내버리는 순종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에 소경이 치료받았는데 마가복음 10장 46~52절을 보면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도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치료해 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그 주인공이지요.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 질러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오게 하시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왔습니다. 그가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기에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겉옷을 내버린 데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거지의 겉옷은 더럽고 역한 냄새가 나지만 자신의 몸을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재산입니다. 바디매오는 추하고 냄새나는 겉옷을 입고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예수라는 분은 매우 거룩하고 깨끗하신 분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치료해 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분임을 알았지요. 그러니 냄새나고 추한 겉옷을 입고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즉시 순종하여 내버린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성령 받기 전이었으나 선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자 가장 소중한 겉옷이라도 즉시 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겉옷은 영적으로 우리의 추하고 냄새나는 마음을 뜻합니다. 자존심, 교만 등 온갖 더러운 비진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추하고 냄새나는 모든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원한다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는 죄목을 낱낱이 회개해야 합니다. 거지 바디매오처럼 성령의 음성으로 주관해 주시는 것에 주저함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이유는 반드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술로 믿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지요. 눈먼 사람이 응답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응답을 주고자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보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니 그대로 응답이 되었지요. 이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공의에 맞게 합당한 자격을 갖추면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춰야 할까요?
① 예수님을 중심에서 ( )해야 한다.
② ( )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한다.
③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 )이 있어야 한다.
④ 겉옷을 내버리는 ( )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79~1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리고’
요단강 서쪽,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한 여리고는 요단 계곡에 위치한 성읍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어서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점령한 곳이다.
당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해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6일 동안은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고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다. 총 13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함께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소원을 무엇이든지 고백하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신속히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더라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기만 한다면 아무리 크고 어려워 보이는 문제도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소리를 발하시자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자 그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자 그가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을 붙좇았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근본의 소리’라고 합니다.
‘근본의 소리’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근본의 소리로 하나님의 응답을 신속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첫째, 예수님을 중심에서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을 나타내며 말씀을 확증하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나 뛰고 문둥병이 치료되었으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귀신이 나가는 등 갖가지 질병과 연약한 사람을 고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은 널리 퍼졌고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윗의 자손에게서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는 분임을 마음 중심에서 믿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는 비록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가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처럼 마음이 선했기에 소문을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둘째,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은 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을까요? 창세기 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시조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죄가 들어오고 육의 사람으로 전락하여 땀 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기 위해서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즉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수고를 해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했고,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하였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에 맞도록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문제를 응답받고자 한다면 어떠해야겠습니까. 따라서 소경이 응답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구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소리 내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도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간절한 심정으로 공의에 맞게 구하였지요. 따라서 소경이 눈을 뜰 수 있었던 세 번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다는 점입니다. 만일 소경이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을 때 기분이 상하여 낙심해 버렸다면 결코 응답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했기에 거기에 굴하지 않고 간절히 부르짖어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하여 돌아가 버리거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변함없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넷째, 겉옷을 내버리는 순종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에 소경이 치료받았는데 마가복음 10장 46~52절을 보면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도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치료해 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그 주인공이지요.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 질러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오게 하시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왔습니다. 그가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기에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겉옷을 내버린 데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거지의 겉옷은 더럽고 역한 냄새가 나지만 자신의 몸을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재산입니다. 바디매오는 추하고 냄새나는 겉옷을 입고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예수라는 분은 매우 거룩하고 깨끗하신 분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치료해 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분임을 알았지요. 그러니 냄새나고 추한 겉옷을 입고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즉시 순종하여 내버린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성령 받기 전이었으나 선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자 가장 소중한 겉옷이라도 즉시 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겉옷은 영적으로 우리의 추하고 냄새나는 마음을 뜻합니다. 자존심, 교만 등 온갖 더러운 비진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추하고 냄새나는 모든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원한다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는 죄목을 낱낱이 회개해야 합니다. 거지 바디매오처럼 성령의 음성으로 주관해 주시는 것에 주저함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이유는 반드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술로 믿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지요. 눈먼 사람이 응답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응답을 주고자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보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니 그대로 응답이 되었지요. 이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공의에 맞게 합당한 자격을 갖추면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춰야 할까요?
① 예수님을 중심에서 ( )해야 한다.
② ( )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한다.
③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 )이 있어야 한다.
④ 겉옷을 내버리는 ( )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79~1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리고’
요단강 서쪽,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한 여리고는 요단 계곡에 위치한 성읍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어서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점령한 곳이다.
당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해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6일 동안은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고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다. 총 13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함께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2019-08-09
제32과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5~19
읽을말씀 : 마태복음 16:15~1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6:16 ㅣ 참고 말씀: 로마서 10:10
교육목표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부부는 평생을 같이 살면서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꼭 그걸 말로 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입술의 고백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백 번, 천 번 말로는 “사랑한다.” 해놓고 정작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 마음에 간직한 것을 상대에게 표현할 때 기쁨이 배가 되고 행복이 넘쳐납니다. 영적으로도 마음에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입술 고백의 중요성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의에 이르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왜 마음에 믿은 것을 입술로 시인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바로 입술의 고백을 통해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서 믿어지는 믿음 없이 입술로만 “믿습니다.” 하는 사람은 믿음에 대한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믿은 것을 입술로도 고백하는 사람은 행함을 통해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시며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2. 입술의 고백을 통해 물 위를 걸은 베드로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무리들을 다 떠나 보내고 홀로 남아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제자들은 건너편 벳새다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지요.
그런데 밤 4경(새벽 3시~6시)에 거센 풍랑을 만나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다 위로 누군가 유유히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자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지요.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곧바로 순종하여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믿음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마음에서 믿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한 이 고백은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중심에서 예수님을 백 퍼센트 인정하는 믿음이라면 “주여! 주는 무엇이나 하실 수 있나이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기에 “만일 주시어든” 하며 확인하는 듯한 고백을 하였지요.
3. 입술의 고백을 통해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
마침내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며 물 위를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백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메시아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지요. “미쳤다.”, “바알세불 지폈다.”, “미혹하는 자다.”,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 온갖 중상모략과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판단 정죄를 하는 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지요. 나쁜 소문도 있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힘을 드릴 수 있는 선한 고백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지요. 이때 베드로가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께 “만일 주시어든”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당당히 “주는”이라 고백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 하시며 베드로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축복과 함께 육의 공간 안에서 영의 공간의 일을 펼칠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를 통해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며, 죽은 사람이 살아날 뿐 아니라, 수천 명이 일시에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지요.
또한 베드로가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니 즉시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나타난 것은 그에게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시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을 받으려면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질병과 연약함을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그중에는 이방인도 있지만 대부분이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은 유대인이었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들의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에 질병과 연약함이 치료되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인정한다는 증거를 행함으로 나타냈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애쓴 것은 아직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예수님 앞에 나가면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응답받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면 예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를 통하여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질병이나 연약함은 물론, 아무리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조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관심조차 없는 사람에게까지 기도해 주고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였다 해도 정작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인정하여 입술로 고백했기 때문에 공의에 조금도 어그러짐 없이 축복의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중심의 깨달음에 따른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나오는 입술의 고백을 통해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라도 신속히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부부는 평생을 같이 살면서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꼭 그걸 말로 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입술의 고백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백 번, 천 번 말로는 “사랑한다.” 해놓고 정작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 마음에 간직한 것을 상대에게 표현할 때 기쁨이 배가 되고 행복이 넘쳐납니다. 영적으로도 마음에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입술 고백의 중요성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의에 이르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왜 마음에 믿은 것을 입술로 시인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바로 입술의 고백을 통해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서 믿어지는 믿음 없이 입술로만 “믿습니다.” 하는 사람은 믿음에 대한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믿은 것을 입술로도 고백하는 사람은 행함을 통해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시며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2. 입술의 고백을 통해 물 위를 걸은 베드로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무리들을 다 떠나 보내고 홀로 남아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제자들은 건너편 벳새다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지요.
그런데 밤 4경(새벽 3시~6시)에 거센 풍랑을 만나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다 위로 누군가 유유히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자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지요.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곧바로 순종하여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믿음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마음에서 믿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한 이 고백은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중심에서 예수님을 백 퍼센트 인정하는 믿음이라면 “주여! 주는 무엇이나 하실 수 있나이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기에 “만일 주시어든” 하며 확인하는 듯한 고백을 하였지요.
3. 입술의 고백을 통해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
마침내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며 물 위를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백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메시아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지요. “미쳤다.”, “바알세불 지폈다.”, “미혹하는 자다.”,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 온갖 중상모략과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판단 정죄를 하는 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지요. 나쁜 소문도 있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힘을 드릴 수 있는 선한 고백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지요. 이때 베드로가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께 “만일 주시어든”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당당히 “주는”이라 고백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 하시며 베드로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축복과 함께 육의 공간 안에서 영의 공간의 일을 펼칠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를 통해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며, 죽은 사람이 살아날 뿐 아니라, 수천 명이 일시에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지요.
또한 베드로가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니 즉시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나타난 것은 그에게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시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을 받으려면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질병과 연약함을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그중에는 이방인도 있지만 대부분이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은 유대인이었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들의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에 질병과 연약함이 치료되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인정한다는 증거를 행함으로 나타냈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애쓴 것은 아직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예수님 앞에 나가면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응답받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면 예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를 통하여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질병이나 연약함은 물론, 아무리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조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관심조차 없는 사람에게까지 기도해 주고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였다 해도 정작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인정하여 입술로 고백했기 때문에 공의에 조금도 어그러짐 없이 축복의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중심의 깨달음에 따른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나오는 입술의 고백을 통해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라도 신속히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2019-08-02
제31과믿음
히브리서 10:22
읽을말씀 : 히브리서 10:22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0:22 ㅣ 참고 말씀: 요한일서 3:21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 자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즉시 응답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거나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1.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과의 관계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여기서 ‘참마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믿음은 참마음을 이룬 만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참마음을 이룬 사람의 고백이야말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저마다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은 다릅니다. 참마음을 이루어 백 퍼센트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전히 이루지 못하여 오십 퍼센트밖에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반밖에 믿지 못하는구나.” 하실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진실함의 정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분량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믿는다’는 고백과 상대를 신뢰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린 자녀를 집에 두고 외출할 때 “얌전히 집 잘 보고 있어라. 엄마는 널 믿는다.”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정말 자녀를 믿어서 말한 것일까요? 참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몇 시까지 들어올게. 집 잘 보고 있어.” 해도 되는데 미덥지 못하니 ‘믿는다’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엄마가 깨끗이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럽히지 말고, 엄마 화장품 만지지 말아라. 가스 불은 위험하니까 켜면 안 된다.” 등 염려가 되니 당부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당부하고 외출했으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으니 “지금 뭐하니? 아무 일 없지?”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녀에게 “너를 믿는다.” 했다면 자녀를 백 퍼센트 믿는 데서 나온 진실한 고백이지요. 이처럼 얼마나 순종하고 진실한지에 따라 신뢰가 가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미덥지 못한 자녀도 있습니다.
만일 백 퍼센트 신뢰하는 자녀가 무엇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이유도 묻지 않고 바라는 대로 해 줍니다. ‘당연히 필요해서 구하겠지. 허튼 일을 할 아이가 아니니까.’ 하며 자녀에 대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구하는 대로 들어주지요.
그러나 자녀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요구가 타당할 때라야 비로소 들어줍니다. 자녀에 대한 믿음이 적을수록 부모는 자녀의 요구 사항을 몇 차례 확인하고도 들어주기를 주저하지요. 그래도 자녀가 계속해서 조르고 떼를 쓴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강청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미덥지 못한 자녀가 강청하니 마지못해 조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진리 가운데 행하여 책망받을 것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마다 주실 수 있도록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번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롬 4:19~22).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은 자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99세, 아내 사라가 89세로 이미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듬해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전혀 의심치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듬해에 아들 이삭을 낳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믿음의 시험이 남아 있었지요.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드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히 11:17~19).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잡으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창 22:12).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했으며, 믿음의 시험을 통하여 온전한 믿음을 인정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려면
당회장님의 경우, 7년간 온갖 질병으로 인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님의 전도로 성전에 가서 단지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질병을 치료받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며 각종 예배는 물론 여기저기 부흥성회를 찾아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행했습니다.
당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매일같이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등 ‘어찌하면 하나님 말씀을 더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니 즉시 끊어 버렸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해야 한다고 하니 곧바로 드렸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하라’ 하는 것은 했고, ‘지키라’ 하는 것은 지켰습니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았으며, ‘버리라’ 하는 것은 버려 나갔습니다. 만일 쉽게 버려지지 않으면 금식하며 기도해서라도 버렸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날로 더욱 견고해져 어떤 시험이 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결코 하나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니 어느새 거짓이 없는 참마음이 되어 갔습니다.
주의 종으로 부름받은 후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권능의 종이 되기 위해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시험이 올 때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모든 시험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의 역사를 바탕으로 2000년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성회를 이루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으며 계명들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변화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다. 또 ( )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소유하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43~15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였고 노년에 축복하려 했으나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게 된다.
이삭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과 함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 버릴 때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양보함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 자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즉시 응답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거나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1.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과의 관계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여기서 ‘참마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믿음은 참마음을 이룬 만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참마음을 이룬 사람의 고백이야말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저마다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은 다릅니다. 참마음을 이루어 백 퍼센트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전히 이루지 못하여 오십 퍼센트밖에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반밖에 믿지 못하는구나.” 하실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진실함의 정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분량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믿는다’는 고백과 상대를 신뢰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린 자녀를 집에 두고 외출할 때 “얌전히 집 잘 보고 있어라. 엄마는 널 믿는다.”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정말 자녀를 믿어서 말한 것일까요? 참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몇 시까지 들어올게. 집 잘 보고 있어.” 해도 되는데 미덥지 못하니 ‘믿는다’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엄마가 깨끗이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럽히지 말고, 엄마 화장품 만지지 말아라. 가스 불은 위험하니까 켜면 안 된다.” 등 염려가 되니 당부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당부하고 외출했으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으니 “지금 뭐하니? 아무 일 없지?”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녀에게 “너를 믿는다.” 했다면 자녀를 백 퍼센트 믿는 데서 나온 진실한 고백이지요. 이처럼 얼마나 순종하고 진실한지에 따라 신뢰가 가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미덥지 못한 자녀도 있습니다.
만일 백 퍼센트 신뢰하는 자녀가 무엇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이유도 묻지 않고 바라는 대로 해 줍니다. ‘당연히 필요해서 구하겠지. 허튼 일을 할 아이가 아니니까.’ 하며 자녀에 대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구하는 대로 들어주지요.
그러나 자녀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요구가 타당할 때라야 비로소 들어줍니다. 자녀에 대한 믿음이 적을수록 부모는 자녀의 요구 사항을 몇 차례 확인하고도 들어주기를 주저하지요. 그래도 자녀가 계속해서 조르고 떼를 쓴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강청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미덥지 못한 자녀가 강청하니 마지못해 조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진리 가운데 행하여 책망받을 것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마다 주실 수 있도록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번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롬 4:19~22).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은 자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99세, 아내 사라가 89세로 이미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듬해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전혀 의심치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듬해에 아들 이삭을 낳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믿음의 시험이 남아 있었지요.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드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히 11:17~19).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잡으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창 22:12).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했으며, 믿음의 시험을 통하여 온전한 믿음을 인정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려면
당회장님의 경우, 7년간 온갖 질병으로 인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님의 전도로 성전에 가서 단지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질병을 치료받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며 각종 예배는 물론 여기저기 부흥성회를 찾아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행했습니다.
당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매일같이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등 ‘어찌하면 하나님 말씀을 더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니 즉시 끊어 버렸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해야 한다고 하니 곧바로 드렸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하라’ 하는 것은 했고, ‘지키라’ 하는 것은 지켰습니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았으며, ‘버리라’ 하는 것은 버려 나갔습니다. 만일 쉽게 버려지지 않으면 금식하며 기도해서라도 버렸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날로 더욱 견고해져 어떤 시험이 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결코 하나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니 어느새 거짓이 없는 참마음이 되어 갔습니다.
주의 종으로 부름받은 후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권능의 종이 되기 위해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시험이 올 때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모든 시험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의 역사를 바탕으로 2000년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성회를 이루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으며 계명들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변화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다. 또 ( )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소유하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43~15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였고 노년에 축복하려 했으나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게 된다.
이삭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과 함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 버릴 때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양보함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2019-07-26
제30과순종
빌립보서 2:8
읽을말씀 : 빌립보서 2:8 | 외울말씀 : 사무엘상 15:22 ㅣ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1:19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믿음의 증거를 보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지름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도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오직 하나님 뜻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한 순종을 하셨을까요?
1.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열린 인간 구원의 길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공의에 따라 사망에 이르렀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아셨기에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세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죄인 된 인류를 자기가 주관하다 지옥으로 끌고 갈 줄 알았지요.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법칙에 의해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공의의 법칙을 어기고 예수님을 죽였지요. 결국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지요(고전 2:7).
예수님은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한 섭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이 있었기에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2. 첫째 하늘의 공의에 순종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이 하나이신데도 피조물인 사람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하늘의 공의에 합당하게 사셨기 때문에 배고픔과 피곤함, 고통과 슬픔, 외로움을 다 느끼셔야 했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애써 부르짖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40일 금식 중에 원수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는 등 필요한 순간에만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도 얼마든지 멸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지만 잠잠히 핍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당하셨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순종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의의 종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롬 6:16).
3.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증거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한 대로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고 믿음으로 명하면 귀신이 나가며 시험 환난과 모든 재앙이 물러갑니다. 이처럼 공의의 법칙에 따라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순종의 행함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가져오라 할 때 과부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순종했기에 그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공의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꿈과 비전을 주실 때 얼마나 명심하여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믿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며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정도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꿈을 이뤄 주셨습니다. 불과 30살에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왕 다음가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려면
첫째, 성경 66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을 알고 순종하되, 먼저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곧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므로 순종하여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회개하고 통회자복을 하라”는 것은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법칙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우리가 땀 흘려야 소산을 먹는다는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을 알려 주지요(눅 22:44).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구할 바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구할 바를 구하되 정성과 믿음을 내보여야 하지요.
둘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주의 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개척 때 어떤 분이 암에 걸려 들것에 누운 채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앉아서 예배드리세요.” 하시자 가족이 등 뒤를 받쳐서 비스듬히 앉아 예배를 드렸지요. 그분이 일어나 앉기조차 힘든 것을 알고 있지만, 성령의 주관을 받아 명하시는 당회장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결국 치료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지만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관이 오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기도를 하라’는 주관을 받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면 회개의 영이 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헐리거나 방언의 은사를 받는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동안 응답의 축복이 오는 경우도 있지요.
누구든지 공의의 법칙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순종으로 믿음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순종만 하면 하나님 역사가 창대하게 펼쳐집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철저한 ( )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 )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 )의 종이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순종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21~1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순종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 유형 : 징계가 두려워 명령에 억지로 순종한다.
두 번째 유형 :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한다.
세 번째 유형 : 무조건 순종한다.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는다.
네 번째 유형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한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믿음의 증거를 보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지름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도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오직 하나님 뜻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한 순종을 하셨을까요?
1.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열린 인간 구원의 길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공의에 따라 사망에 이르렀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아셨기에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세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죄인 된 인류를 자기가 주관하다 지옥으로 끌고 갈 줄 알았지요.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법칙에 의해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공의의 법칙을 어기고 예수님을 죽였지요. 결국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지요(고전 2:7).
예수님은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한 섭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이 있었기에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2. 첫째 하늘의 공의에 순종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이 하나이신데도 피조물인 사람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하늘의 공의에 합당하게 사셨기 때문에 배고픔과 피곤함, 고통과 슬픔, 외로움을 다 느끼셔야 했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애써 부르짖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40일 금식 중에 원수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는 등 필요한 순간에만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도 얼마든지 멸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지만 잠잠히 핍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당하셨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순종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의의 종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롬 6:16).
3.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증거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한 대로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고 믿음으로 명하면 귀신이 나가며 시험 환난과 모든 재앙이 물러갑니다. 이처럼 공의의 법칙에 따라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순종의 행함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가져오라 할 때 과부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순종했기에 그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공의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꿈과 비전을 주실 때 얼마나 명심하여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믿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며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정도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꿈을 이뤄 주셨습니다. 불과 30살에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왕 다음가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려면
첫째, 성경 66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을 알고 순종하되, 먼저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곧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므로 순종하여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회개하고 통회자복을 하라”는 것은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법칙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우리가 땀 흘려야 소산을 먹는다는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을 알려 주지요(눅 22:44).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구할 바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구할 바를 구하되 정성과 믿음을 내보여야 하지요.
둘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주의 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개척 때 어떤 분이 암에 걸려 들것에 누운 채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앉아서 예배드리세요.” 하시자 가족이 등 뒤를 받쳐서 비스듬히 앉아 예배를 드렸지요. 그분이 일어나 앉기조차 힘든 것을 알고 있지만, 성령의 주관을 받아 명하시는 당회장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결국 치료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지만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관이 오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기도를 하라’는 주관을 받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면 회개의 영이 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헐리거나 방언의 은사를 받는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동안 응답의 축복이 오는 경우도 있지요.
누구든지 공의의 법칙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순종으로 믿음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순종만 하면 하나님 역사가 창대하게 펼쳐집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철저한 ( )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 )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 )의 종이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순종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21~1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순종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 유형 : 징계가 두려워 명령에 억지로 순종한다.
두 번째 유형 :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한다.
세 번째 유형 : 무조건 순종한다.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는다.
네 번째 유형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한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2019-07-19
제29과공의
시편 37:6
읽을말씀 : 시편 37:6 | 외울말씀 : 시편 37:6 ㅣ 참고 말씀: 갈라디아서 6:7
교육목표 :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법칙을 깨달아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응답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정확히 알고 행할 때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공의
‘공의’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법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원인에는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뿌린 대로 거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는 말이 있는데 진리 안에서는 공의의 법칙들이 더욱 확실하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공의의 법칙도 있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든가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는다’ 등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므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만 깨닫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찾아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공의를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주관자인데도 스스로 공의의 법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든 법칙이니까 나는 안 지켜도 괜찮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공의에 맞게 정확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공의의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 사단을 다 멸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 경작을 계획하면서 공의의 법칙을 정해 놓으셨고,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희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단지 “주여, 믿습니다.” 하며 대충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공의의 법칙에 따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3. 공의의 양면성
사람들은 흔히 공의는 무섭고 두려우며 징계와 형벌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가 있기 때문에 죄와 악에는 무섭고 두려운 형벌이 따르지만 반면 공의는 응답과 축복을 가져다 주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공의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지만, 빛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열쇠와 같습니다. 칼을 강도가 들었을 때에는 흉기가 되지만, 어머니가 들었을 때에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도구인 것과 같습니다.
공의의 양면성을 알면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됨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사랑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빗나가서 잘못했을 때 무조건 체벌한다거나 아니면 무조건 용서만 해 준다면 자녀를 잘못되게 만듭니다. 공의에 따라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엄하게 해야 할 때도 있고, 용서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때도 있지요.
마태복음 18장 22절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무한대 용서의 사랑을 말씀하지요. 히브리서 12장 6절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시며 참사랑에는 징계가 따른다는 공의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이는 사랑 안에서 공의가 온전케 되며 공의를 궁구하면 할수록 그 안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4. 수준이 다른 공의 차원
공의는 각각의 하늘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넷째 하늘의 차원으로 올라갈수록 공의의 차원도 더 깊고 넓어지지요. 또한 공의의 차원에 차이가 나는 것은 사랑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랑과 공의는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사랑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공의의 차원도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원리가 적용되었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시며, 용서와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얼마나 사랑을 이루었느냐에 따라 똑같은 공의라도 적용되는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의 수준이 매우 낮은 차원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지극히 높은 차원의 공의를 적용시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지요.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그들의 수준에 맞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낮은 차원의 공의의 법칙을 적용하며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주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의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차원을 보았기 때문에 용서와 긍휼이 적용되는 공의의 차원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는 얼마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영으로 일구느냐에 따라 저마다 느끼는 차원 역시 다릅니다.
5. 공의의 기본 법칙은 믿음과 순종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선과 겸비함 등 많은 응답의 법칙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법칙은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 응답받는 것이 바로 공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이러한 공의의 법칙대로 행했지요.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위해 지배국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신분을 벗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겸비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인의 병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오는 선한 마음도 있었지요. 무엇보다 그가 응답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만 나가면 어떤 병도 깨끗이 치료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대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려면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서운케 하거나, 하나님 앞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하지 못한 것 등을 회개해야 하지요. 또한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며, 혈기, 짜증, 감정, 시기, 질투, 다툼, 거짓 등 온갖 악을 품고 행한 것을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기도받을 때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대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각종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심는 등 응답받기 위해 순종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순종이 나오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즉 교만, 자존심, 틀, 생각, 이론, 세상의 자랑, 세상에 의지하려는 마음 등을 다 버려야 하지요. 이러한 하나님 공의의 법칙을 하나하나 깨달아 행함으로써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 응답과 풍성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과 그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 )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된다. ( )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 )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9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늘들’
첫째 하늘 - 우리가 살고 있는 육의 공간이다.
둘째 하늘 - 빛의 영역인 에덴과 어둠의 영역이 있는 곳이다.
셋째 하늘 -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이 있는 곳이다.
넷째 하늘 - 근본 하나님의 공간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 곳이다.
교육목표 :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법칙을 깨달아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응답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정확히 알고 행할 때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공의
‘공의’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법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원인에는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뿌린 대로 거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는 말이 있는데 진리 안에서는 공의의 법칙들이 더욱 확실하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공의의 법칙도 있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든가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는다’ 등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므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만 깨닫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찾아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공의를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주관자인데도 스스로 공의의 법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든 법칙이니까 나는 안 지켜도 괜찮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공의에 맞게 정확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공의의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 사단을 다 멸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 경작을 계획하면서 공의의 법칙을 정해 놓으셨고,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희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단지 “주여, 믿습니다.” 하며 대충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공의의 법칙에 따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3. 공의의 양면성
사람들은 흔히 공의는 무섭고 두려우며 징계와 형벌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가 있기 때문에 죄와 악에는 무섭고 두려운 형벌이 따르지만 반면 공의는 응답과 축복을 가져다 주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공의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지만, 빛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열쇠와 같습니다. 칼을 강도가 들었을 때에는 흉기가 되지만, 어머니가 들었을 때에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도구인 것과 같습니다.
공의의 양면성을 알면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됨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사랑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빗나가서 잘못했을 때 무조건 체벌한다거나 아니면 무조건 용서만 해 준다면 자녀를 잘못되게 만듭니다. 공의에 따라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엄하게 해야 할 때도 있고, 용서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때도 있지요.
마태복음 18장 22절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무한대 용서의 사랑을 말씀하지요. 히브리서 12장 6절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시며 참사랑에는 징계가 따른다는 공의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이는 사랑 안에서 공의가 온전케 되며 공의를 궁구하면 할수록 그 안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4. 수준이 다른 공의 차원
공의는 각각의 하늘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넷째 하늘의 차원으로 올라갈수록 공의의 차원도 더 깊고 넓어지지요. 또한 공의의 차원에 차이가 나는 것은 사랑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랑과 공의는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사랑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공의의 차원도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원리가 적용되었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시며, 용서와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얼마나 사랑을 이루었느냐에 따라 똑같은 공의라도 적용되는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의 수준이 매우 낮은 차원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지극히 높은 차원의 공의를 적용시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지요.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그들의 수준에 맞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낮은 차원의 공의의 법칙을 적용하며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주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의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차원을 보았기 때문에 용서와 긍휼이 적용되는 공의의 차원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는 얼마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영으로 일구느냐에 따라 저마다 느끼는 차원 역시 다릅니다.
5. 공의의 기본 법칙은 믿음과 순종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선과 겸비함 등 많은 응답의 법칙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법칙은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 응답받는 것이 바로 공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이러한 공의의 법칙대로 행했지요.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위해 지배국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신분을 벗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겸비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인의 병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오는 선한 마음도 있었지요. 무엇보다 그가 응답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만 나가면 어떤 병도 깨끗이 치료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대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려면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서운케 하거나, 하나님 앞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하지 못한 것 등을 회개해야 하지요. 또한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며, 혈기, 짜증, 감정, 시기, 질투, 다툼, 거짓 등 온갖 악을 품고 행한 것을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기도받을 때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대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각종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심는 등 응답받기 위해 순종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순종이 나오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즉 교만, 자존심, 틀, 생각, 이론, 세상의 자랑, 세상에 의지하려는 마음 등을 다 버려야 하지요. 이러한 하나님 공의의 법칙을 하나하나 깨달아 행함으로써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 응답과 풍성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과 그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 )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된다. ( )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 )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9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늘들’
첫째 하늘 - 우리가 살고 있는 육의 공간이다.
둘째 하늘 - 빛의 영역인 에덴과 어둠의 영역이 있는 곳이다.
셋째 하늘 -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이 있는 곳이다.
넷째 하늘 - 근본 하나님의 공간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 곳이다.
2019-07-12
제28과삼위일체 하나님
마태복음 28:19
읽을말씀 : 마태복음 28:1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28:19 ㅣ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13:13
교육목표 :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역할을 바로 알아 참된 믿음을 갖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지만 동시에 세 분의 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격인 성부 하나님, 아들의 격인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의 격인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근본은 하나이기에 ‘성 삼위일체’라 표현하지요.
이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에 대한 비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제한적인 사고와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놀라운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낳거나 지은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스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지각과 상상을 초월해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광대한 공간 안에 홀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셨습니다(요 1:1, 요일 1:5).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고,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가장 먼저 공간을 나누셨습니다. 영의 공간과 육의 몸을 입은 사람들이 살아갈 육의 공간을 나누신 것이지요. 그 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됩니다.
성경에는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행 13:33, 히 5:5), 성령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요 15:26, 갈 4:6). 마치 분신을 만들어 내듯이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을 낳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경작을 위한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근본 하나이지만 인간 경작을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역할은 다르지만 마음도, 생각도, 능력도 하나이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질서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느끼고 원하시는 것을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도 동일하게 느끼고 원하시지요. 역으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의 기쁨이나 고통을 성부 하나님께서도 그대로 느끼십니다. 그런데도 역할에 따라 성품이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으셨지만 성자 예수님은 신성적인 면이 더 강해 신(神)적 위엄과 공의가 두드러집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인성(人性)적인 면이 더 강하므로 자상하고 섬세하며 자비와 긍휼의 측면을 더 많이 갖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지만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성품이 구별될 뿐 아니라 뚜렷한 질서 가운데 각각의 역할이 다릅니다. 성부 하나님 다음이 성자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은 그 다음이 되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사랑으로 섬기십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한 사역 또한 함께 이루어 가십니다. 각각의 역할을 정확히 감당하심으로 인간의 창조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작의 섭리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과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담당하시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1) 구원의 길을 여시는 성자 예수님
성자 예수님의 역할은 구세주로서, 죄인 된 인류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이유는 영계의 법칙에 의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려면 첫째로,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며 셋째로,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하고 넷째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십자가의 도 책자 참조).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결합돼 난 것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으셨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으셨지요. 이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로 죄를 용서받게 됐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셨다면 불순종한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는 다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인간 경작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으실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 성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2)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님
인간 경작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 얻은 구원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그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의 특징은 영을 무수히 분리해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본체는 한 곳에 계실지라도 본체와 똑같은 마음과 능력을 가진 영이 무수히 분리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사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도 그 영을 분리하시지만 특별히 성령님이 사역을 하시는 데는 영으로 분리하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이처럼 분리되신 성령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구원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이끄는 개인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또한 부지런히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할 때는 애통하시며 회개해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롬 8:26). 이와 함께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과 각종 은사들을 주셔서 능히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도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3)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신 성부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라는 거대한 계획의 총감독자가 되시며, 창조주요 만물의 주관자이며 마지막 때의 심판자 역할을 하십니다.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성취해 나가는 데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은 질서 가운데 정확히 나뉘어져 있지만, 결국 세 분이 동시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8절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물은 영적으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며, 피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과 물과 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 되어 사역해 믿는 자녀들에게 구원받은 증거를 주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축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역할을 바로 알아 참된 믿음을 갖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지만 동시에 세 분의 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격인 성부 하나님, 아들의 격인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의 격인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근본은 하나이기에 ‘성 삼위일체’라 표현하지요.
이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에 대한 비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제한적인 사고와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놀라운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낳거나 지은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스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지각과 상상을 초월해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광대한 공간 안에 홀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셨습니다(요 1:1, 요일 1:5).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고,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가장 먼저 공간을 나누셨습니다. 영의 공간과 육의 몸을 입은 사람들이 살아갈 육의 공간을 나누신 것이지요. 그 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됩니다.
성경에는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행 13:33, 히 5:5), 성령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요 15:26, 갈 4:6). 마치 분신을 만들어 내듯이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을 낳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경작을 위한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근본 하나이지만 인간 경작을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역할은 다르지만 마음도, 생각도, 능력도 하나이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질서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느끼고 원하시는 것을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도 동일하게 느끼고 원하시지요. 역으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의 기쁨이나 고통을 성부 하나님께서도 그대로 느끼십니다. 그런데도 역할에 따라 성품이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으셨지만 성자 예수님은 신성적인 면이 더 강해 신(神)적 위엄과 공의가 두드러집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인성(人性)적인 면이 더 강하므로 자상하고 섬세하며 자비와 긍휼의 측면을 더 많이 갖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지만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성품이 구별될 뿐 아니라 뚜렷한 질서 가운데 각각의 역할이 다릅니다. 성부 하나님 다음이 성자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은 그 다음이 되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사랑으로 섬기십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한 사역 또한 함께 이루어 가십니다. 각각의 역할을 정확히 감당하심으로 인간의 창조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작의 섭리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과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담당하시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1) 구원의 길을 여시는 성자 예수님
성자 예수님의 역할은 구세주로서, 죄인 된 인류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이유는 영계의 법칙에 의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려면 첫째로,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며 셋째로,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하고 넷째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십자가의 도 책자 참조).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결합돼 난 것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으셨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으셨지요. 이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로 죄를 용서받게 됐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셨다면 불순종한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는 다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인간 경작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으실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 성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2)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님
인간 경작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 얻은 구원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그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의 특징은 영을 무수히 분리해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본체는 한 곳에 계실지라도 본체와 똑같은 마음과 능력을 가진 영이 무수히 분리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사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도 그 영을 분리하시지만 특별히 성령님이 사역을 하시는 데는 영으로 분리하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이처럼 분리되신 성령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구원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이끄는 개인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또한 부지런히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할 때는 애통하시며 회개해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롬 8:26). 이와 함께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과 각종 은사들을 주셔서 능히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도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3)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신 성부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라는 거대한 계획의 총감독자가 되시며, 창조주요 만물의 주관자이며 마지막 때의 심판자 역할을 하십니다.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성취해 나가는 데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은 질서 가운데 정확히 나뉘어져 있지만, 결국 세 분이 동시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8절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물은 영적으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며, 피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과 물과 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 되어 사역해 믿는 자녀들에게 구원받은 증거를 주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축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2019-07-05
제27과맥추절을 지키라
출애굽기 23:14~18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4~18 | 외울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6~18 ㅣ 참고 말씀: 신명기 16:10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맥추절을 지키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년 동안 광활하고 메마른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누렇게 익은 밀밭을 볼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씨를 심고 그 열매를 수확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이러한 훗날의 일들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도 전에 그곳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로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맥추절은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들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절기를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그러면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들이 절기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1)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임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게 되지요. 또한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베다니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역시 마리아에 비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늘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니십니까? 또는 은혜를 받을 때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그 은혜를 곧 잊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의 조건으로 여겨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계시는지요?
2)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맥추절을 지키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년 동안 광활하고 메마른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누렇게 익은 밀밭을 볼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씨를 심고 그 열매를 수확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이러한 훗날의 일들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도 전에 그곳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로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맥추절은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들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절기를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그러면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들이 절기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1)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임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게 되지요. 또한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베다니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역시 마리아에 비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늘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니십니까? 또는 은혜를 받을 때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그 은혜를 곧 잊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의 조건으로 여겨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계시는지요?
2)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