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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러시아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 드미트리 뽈랴코프 목사
출처
날짜
2005년 3월 4일 금요일
조회수: 6860
특|집|1| 러시아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러시아여! 바벨론에서 벗어나 우리에게로 오라!

뉴스 드미트리 뽈랴코프 목사
(러시아 교회협의회 이사장, 유니온 크리스챤 교회 담임)


이제 러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시작되도다! 때가 차매 이제 러시아는 바벨론에서 나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게 되었도다.

2002년, 러시아는 너무나도 강하게 러시아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일들이 1년 후인 2003년부터 전개되리라 느껴왔다. 사실 그동안 러시아 역사는 내내 극단적인 긴장과 전쟁, 정치적 경제적 위기 속에 한 세기의 역사를 뒤엎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나간 과거를 재평가하고 현재를 직시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제 러시아 역사는 장차 100년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허드슨에게 보여 주신 러시아의 비전

러시아는 놀라운 영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부여받는 참으로 축복받은 나라이다. 1855년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러시아의 비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주님은 제게 이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상중에 전 세계를 뒤엎는 큰 전쟁을 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다소 수그러드는 듯 하지만 금새 다시 불같이 일어나게 되고 큰 두 전쟁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전쟁으로 불안과 공포가 수많은 나라와 백성을 강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어떤 곳에서는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는 것도 보았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있지 않을 대대적인 거국적 영적 대각성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 축복은 러시아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유럽 국가들로 번져가게 됩니다. 그런 대각성 후에 주님의 재림이 이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러시아 전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언이 현실로 성취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했던 70년의 공산주의 치하를 이겨낸 러시아 신앙의 역사 속에 이제 러시아를 향해 예비하셨다가 나타내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는 정녕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70년의 러시아 신앙의 암흑은 BC 605에서 BC 586까지 있었던 이스라엘의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알려진 것처럼 러시아 연합정부는 한 때 '거룩한 정부'라는 말로도 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위대한 유산을 가진 복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 70년 동안 하나님을 잃었고 영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유물론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864년 그 유명한 비잔틴 선교사 성 키릴과 성 메소디우스는 성경과 기도문을 슬라브 언어로 번역했고 이로 말미암아 많은 슬라브계 국가들이 비잔틴 정교로 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980년 드디어 블라디미르 1세가 키예프의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즉위 후 초기 통치시대에만 해도 이교도였으나, 988년 비잔틴 황제 바실 2세의 누이 앤 공주와 결혼한 후 그리스 정교로 개종을 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정교를 키예프 공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발표했습니다.

슬라브계 교회는 상당한 권력과 규칙이 있었습니다. 블라디미르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택한 일은 러시아의 미래에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슬라브계 국가들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구별된 자기 정체성을 갖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정교의 역사

러시아 정교는 1448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독립을 했고 1589년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제레미야 2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모스크바에 대주교가 임명되었습니다. 러시아 교회와 짜르의 위치상 고대 로마와 비잔틴 제국에 이어 그 제국의 영화로움을 생각할 때,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와 같았습니다. 1721년 러시아 황제 피터 대제는 대주교 제도를 폐지시켰고 그 후로 교회는 제국에 의해 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 시 대주교 제도는 다시 부활되는 듯 했으나, 교회는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핍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러시아 기독교의 암흑의 시작이었습니다.

칼 막스는 종교를 가리켜 민중의 아편이라고 그의 저술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비에트 공산 정부는 처음부터 직접 통제하지 못하던 모든 사회 조직과 종교 단체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1917년 이후 즉시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 정교회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고 교리 전파를 금지했고 반종교 선전단체를 세웠고 교회 사제들을 핍박했습니다. 1920년대 시들했었던 무신론의 열풍이 1929년 이후로 다시금 거세게 일기 시작했고, 수천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말 무신론의 기운이 조금 약해졌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실질적으로는 기독교 신자들을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 이후로 소비에트 종교 탄압 정책은 러시아 정교보다는 러시아 황제의 관심 아래 세워져 러시아 애국주의 운동과 연대하는 다른 기독교 교회들에 대해 탄압하는 쪽으로 선회했습니다. 러시아 공산 정부는 러시아 정교 안에서 스파이들을 만들려 했고 1960년대와70년대 조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행동파 반정부자들에 대해 가혹하게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에트 통치 기간 동안 종교적인 표현의 자유는 거의 없었고 공산당은 종교 단체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공산 정부는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했고 1990년도에는 러시아인들에게 좀 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공산정부는 무너졌지만

1991년 8월19~22일까지 러시아 역사상 기독교 영적 포로 생활을 마감하는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70년 동안의 소비에트 공산 정부가 드디어 붕괴된 것입니다. 철의 장막이 무너졌고 장장 3세대 동안을 전 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 소외시켰던 온 나라에 자유의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자유와 선택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관심과 무책임 속에 주체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이던 민족성을 지닌 나라였지만 이제 새 나라가 도래하고 있고 비로소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처음으로 성경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곧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와 선택의 기회를 혼동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바른 결정을 내릴 만큼 성숙되어 있지는 못했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만큼 큰 도전이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지만, 무엇을 결정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부족한 탓에 어떤 사람들은 마약을 찾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무엇인가의 헛된 탈출구를 찾게 되었습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상트 페테르부르그만 해도 집없는 아이가 30,000 명, 마약 복용자 30,000 명, 등록된 마약 상습복용자의 91%가 HIV 양성반응, 범죄의 92%가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 관련, 마약 중독자의 평균 연령이 11세.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이후 종교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고 전통 종교들 특히 러시아 정교가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정교는 이제 러시아 제 1의 종교입니다. 러시아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이 러시아 정교에 속하며 그들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 신자들의 대부분은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건 비신자들이든 교회에 대해 러시아의 위대한 유산이자 역사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두 번째 세력이 큰 종교는 무슬림입니다. 그에 반해 상대적으로 유대교, 개신교, 카톨릭, 불교는 열세인 편입니다. 그래도 유대교와 개신교는 전 나라에 퍼져 있기는 합니다. 러시아 정교가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단 하나만의 종교에 집착하지는 않고 보통 전통적인 신앙에다 다른 종교 두 서넛을 더 의지하려 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 간에는 주술이나 점성술도 유행입니다. 이와 같이 러시아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다양한 종파, 교파가 있습니다.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다른 설교자들이 다양한 종교들과 심지어 뉴에이지 운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뉴스피의 구원 사원

간절히 부흥집회를 사모하고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그

이처럼 외국 종교의 유입과 성장을 지켜보면서 정부에서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1997년 정부는 1990년에 세운 종교 자유법을 개정하여 러시아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종교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범주를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정교와 몇몇 종교만 정식 종교 단체로 규정을 하고 다른 종교 단체는 활동하는데 큰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국에서 러시아를 위하여 특히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한국의 형제자매들이 직접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방문하신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간절히 부흥 집회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550만의 인구로 러시아 제 2의 도시인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러시아의 문화 중심도시로 러시아 전체를 들어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서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불리며 항상 새롭고 흥미있는 것들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를 향한 우리의 관심은 데살로니가전서 5:21~22에 말씀하시는대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입니다.

2003년 5월 27일,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300주년 기념축하 행사를 개막했습니다. 이 행사는 러시아에 역사적인 이정표가 되고 있고 또한 영적인 지표가 될 것입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러시아 3대 혁명의 도시로 러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3대 혁명은 러시아만 아니라 온 세계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뉴스푸시킨 시에 위치한 예카테리나 궁전

제4의 대혁명을 기대하며

이제 우리는 제4의 대혁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있게 될 제 4혁명은 인간의 피흘림의 혁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말미암는 용서와 부흥과 치료의 혁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곳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부흥이 시작되어 온 나라로 그리고 전세계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것을 믿으며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가 주님이 보여 주신 환상 가운데 본대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러시아 대부흥'이라고 부릅니다.



(번역 : 이상원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