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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늬만 믿음 - 정구영 권사(전 서울여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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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년 3월 1일 화요일
조회수: 4674
|칼|럼|
무늬만 믿음
정구영 권사(전 서울여대 총장)
요즈음은 어찌나 사건 사고가 많은지 정신차리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 속에서 얼떨결에 사고에 휘말리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인구에 회자되는 유머 중에는 '버스가 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사고를 내는 바람에 많은 승객이 죽었는데 그 죽은 승객들 중에 누가 가장 억울한 사람일까'를 묻는 질문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는 '버스 안에서 졸다가 자기가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 더 가다가 졸지에 변을 당한 사람' 도 있고, '숨이 차도록 달려와 가까스로 그 버스를 탄사람' 등 기상천외한 답변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1위를 차지한 답변은 '96번 버스를 타려다가 69번 버스를 96번 버스로 착각하고 탄 사람'이었습니다.
웃고 지나가자고 만들어낸 유머이지만 다 있을 법한 경우인지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좀 착잡한 기분이 듭니다. 특별히 69번 버스를 96번 버스로 착각하고 탔다가 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꼭 남의 일일뿐이라고 치부하고 지나가기에는 무언가 캥기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누구나 있겠지만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주병이니 왕자병이니 하는 것이 다 이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서로 무엇이든지 아깝다 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친구지간인 농부와 목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것 저것 이야기하던 중 목사가 농부인 친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 자네에게 백 마리의 말이 있다면 나에게 절반을 뚝 잘라서 줄 수 있겠나" 이에 그 친구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물론 주지" 라고 호기있게 답변했습니다. 목사는 친구인 농부에게 또 물었습니다. '만일 자네에게 소가 백 마리가 있다면 나에게 절반을 나눠 줄 수 있겠나?' 이에 농부는 더욱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절반을 나눠 주지" 목사인 친구가 또다시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자네에게 돼지가 두 마리 있다면 한 마리를 나에게 줄 수 있겠나" 그러자 농부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자네도 알다시피 내게는 돼지 두 마리밖에 없는데 어떻게 한 마리를 줄 수 있겠나. 자, 얘기는 이쯤해서 끝내세."
막연한 상황이나 가상적인 상황 속에서는 큰소리를 칠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상황이 되니 얼마나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여정 속에서도 우리는 이 농부와 참으로 닮은 면들이 있지는 아니한지요. 어찌 우리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시자, 열심이 특심한 베드로가 앞으로 나섭니다. 예수님 주위에 있는 다른 제자들을 둘러보며 힘을 주어 단언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억울하다는 듯 또다시 힘있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답변하니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막14: 27-31).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막14:50). 큰소리 쳤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계집종 앞에서조차 예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막 14:66-72). 베드로도 제자들도 다 착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생각 속에서나 입술로 고백할 때는 믿음이 엄청나게 큰 것 같은데 막상 믿음을 내 보여야 할 때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꽤나 있는 듯 합니다. 말하자면 무늬만 믿음이지 실제로는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에서는 죽은 믿음이라 하며, 세상 사람들은 말만 잘하는 신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왜 베드로의 위대한(?) 착각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게 하셨겠습니까. 착각의 일인자였던 베드로도 성령받고 변화되니 주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그분,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을 선물로 주신 그분,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니 무늬만 믿음이 아니라 속까지 꽉 찬 믿음의 자녀가 되기까지 쉬임없이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겠습니다.
무늬만 믿음
정구영 권사(전 서울여대 총장)
요즈음은 어찌나 사건 사고가 많은지 정신차리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 속에서 얼떨결에 사고에 휘말리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인구에 회자되는 유머 중에는 '버스가 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사고를 내는 바람에 많은 승객이 죽었는데 그 죽은 승객들 중에 누가 가장 억울한 사람일까'를 묻는 질문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는 '버스 안에서 졸다가 자기가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 더 가다가 졸지에 변을 당한 사람' 도 있고, '숨이 차도록 달려와 가까스로 그 버스를 탄사람' 등 기상천외한 답변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1위를 차지한 답변은 '96번 버스를 타려다가 69번 버스를 96번 버스로 착각하고 탄 사람'이었습니다.
웃고 지나가자고 만들어낸 유머이지만 다 있을 법한 경우인지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좀 착잡한 기분이 듭니다. 특별히 69번 버스를 96번 버스로 착각하고 탔다가 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꼭 남의 일일뿐이라고 치부하고 지나가기에는 무언가 캥기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누구나 있겠지만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주병이니 왕자병이니 하는 것이 다 이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서로 무엇이든지 아깝다 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친구지간인 농부와 목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것 저것 이야기하던 중 목사가 농부인 친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 자네에게 백 마리의 말이 있다면 나에게 절반을 뚝 잘라서 줄 수 있겠나" 이에 그 친구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물론 주지" 라고 호기있게 답변했습니다. 목사는 친구인 농부에게 또 물었습니다. '만일 자네에게 소가 백 마리가 있다면 나에게 절반을 나눠 줄 수 있겠나?' 이에 농부는 더욱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절반을 나눠 주지" 목사인 친구가 또다시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자네에게 돼지가 두 마리 있다면 한 마리를 나에게 줄 수 있겠나" 그러자 농부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자네도 알다시피 내게는 돼지 두 마리밖에 없는데 어떻게 한 마리를 줄 수 있겠나. 자, 얘기는 이쯤해서 끝내세."
막연한 상황이나 가상적인 상황 속에서는 큰소리를 칠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상황이 되니 얼마나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여정 속에서도 우리는 이 농부와 참으로 닮은 면들이 있지는 아니한지요. 어찌 우리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시자, 열심이 특심한 베드로가 앞으로 나섭니다. 예수님 주위에 있는 다른 제자들을 둘러보며 힘을 주어 단언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억울하다는 듯 또다시 힘있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답변하니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막14: 27-31).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막14:50). 큰소리 쳤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계집종 앞에서조차 예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막 14:66-72). 베드로도 제자들도 다 착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생각 속에서나 입술로 고백할 때는 믿음이 엄청나게 큰 것 같은데 막상 믿음을 내 보여야 할 때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꽤나 있는 듯 합니다. 말하자면 무늬만 믿음이지 실제로는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에서는 죽은 믿음이라 하며, 세상 사람들은 말만 잘하는 신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왜 베드로의 위대한(?) 착각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게 하셨겠습니까. 착각의 일인자였던 베드로도 성령받고 변화되니 주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그분,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을 선물로 주신 그분,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니 무늬만 믿음이 아니라 속까지 꽉 찬 믿음의 자녀가 되기까지 쉬임없이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