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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이야기] 그리스도의 대사 Hulbert 선교사
출처
날짜
2005년 2월 1일 화요일
조회수: 4765
그리스도의 대사 Hulbert 선교사
"나는 조선 땅에 묻히고 싶어요"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는 참으로 한국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다.
미국의 선교사이며 언어학자요, 사학자였던 그는 1863년 버몬트주(州) 뉴헤이번에서 출생했다. 1884년 다트먼트 대학을 졸업했고 그 해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84년 고종 황제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이 구체화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조선을 위한 중보기도와 선교헌금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85년부터 수많은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하였다.
고종 황제는 열강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영어 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그 요청에 따라 3명의 젊은이들이 영어 교사로 오게 되는데, 모두 신학교를 졸업한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 분이 헐버트 선교사였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 영어 교사로 오게 되었다. 언어학교에서 5년 동안 사역을 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 관리들의 부정에 큰 실망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다시 돌아왔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어 죽는 아픔을 겪었지만 조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헐버트는 누구보다도 조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에,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세계 모든 나라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이 필요하였다. 헐버트는 고종 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돌아가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백악관 문 앞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국제 상황은 미국과 일본 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밀약의 내용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영국도 일본과 동맹체결로 한국 강세를 용인하고 있었다.
1906년에 다시 내한한 헐버트는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행위를 폭로하는 한편, 이듬해 고종에게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였다. 그는 한국 대표단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 《회의시보 Courier de la Conference》에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 노력하였다.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서는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년 추방을 당하였다.
1908년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면서 한국에 관한 글을 썼고, 1919년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徐載弼)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헐버트의 저서로는 The History of Korea(2권), The Passing of Korea 등이 있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조선 유학생을 도와주며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이승만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 왔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한국에 초대하였다. 그는 1949년 8월, 40년 동안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때가 86세였고 하나님은 그의 방문 기간에 그를 부르셨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국장급에 해당하는 장례식을 치뤄 주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까지 따라 왔고,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묻어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에 친필로 헐버트라는 이름을 써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김대중 대통령은 친필로, 비어 있던 묘비에 그의 이름을 써 주었다.
헐버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조선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으니 그의 묘비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나는 조선 땅에 묻히고 싶어요"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는 참으로 한국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다.
미국의 선교사이며 언어학자요, 사학자였던 그는 1863년 버몬트주(州) 뉴헤이번에서 출생했다. 1884년 다트먼트 대학을 졸업했고 그 해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84년 고종 황제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료사역과 교육사역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이 구체화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조선을 위한 중보기도와 선교헌금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85년부터 수많은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하였다.
고종 황제는 열강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영어 선생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그 요청에 따라 3명의 젊은이들이 영어 교사로 오게 되는데, 모두 신학교를 졸업한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 분이 헐버트 선교사였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 영어 교사로 오게 되었다. 언어학교에서 5년 동안 사역을 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 관리들의 부정에 큰 실망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다시 돌아왔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던 중,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어 죽는 아픔을 겪었지만 조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헐버트는 누구보다도 조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에, 고종 황제는 조선의 비운과 국권위협의 상황을 세계 모든 나라에 간곡하게 전달할 사절이 필요하였다. 헐버트는 고종 황제로부터 밀사의 요청을 받고 즉시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돌아가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백악관 문 앞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국제 상황은 미국과 일본 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밀약의 내용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영국도 일본과 동맹체결로 한국 강세를 용인하고 있었다.
1906년에 다시 내한한 헐버트는
헐버트는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서는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일제에 의해 1908년 추방을 당하였다.
1908년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면서 한국에 관한 글을 썼고, 1919년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徐載弼)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헐버트의 저서로는 The History of Korea(2권), The Passing of Korea 등이 있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조선 유학생을 도와주며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이승만 대통령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 왔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한국에 초대하였다. 그는 1949년 8월, 40년 동안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때가 86세였고 하나님은 그의 방문 기간에 그를 부르셨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국장급에 해당하는 장례식을 치뤄 주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까지 따라 왔고,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묻어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에 친필로 헐버트라는 이름을 써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사건을 기억하여 김대중 대통령은 친필로, 비어 있던 묘비에 그의 이름을 써 주었다.
헐버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하였던 선교사였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조선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으니 그의 묘비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나는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