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의 소식
제목
[성지순례] 연재(4) -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출처
날짜
2005년 3월 22일 화요일
조회수: 6708
성|지|순|례| 연재 4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이스라엘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친 순례단은 텔아비브 공항을 출발하여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 모여 사는 대도시이다. 사도 바울은 2차와 3차 전도여행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방인들의 세계로 간주되었던 로마 제국에 속한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고대 아테네는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주도했던 도시였으며 그리스 전성기의 고전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도시 중심에는 높이 해발 150m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있다.
글 정권하
파르테논 (Parthenon) 신전
파르테논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자연적인 암반 위에 자리잡은 고대 그리스의 상징과 같은 건물이다. BC 447년 기공하여 BC 438년 준공한 이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를 섬기기 위해 만든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 건물 유적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1호로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비해서는 그 규모와 건축기술 및 건축된 연도를 비교해 볼 때 훨씬 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레오바고 (Aro pagos)
아레오바고 언덕은 아크로폴리스 옆에 있는 해발 113m의 나지막한 바위언덕이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서 그리스 북부지역인 마케도니아를 거쳐 서기 50년 경 아테네에 도착하였다.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였던 학문과 문화의 도시 아테네에서 사도 바울이 유명한 설교를 한 장소가 바로 아레오바고 언덕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아레오바고에 모여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고 즐거움이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아고라인 시장터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전하는 사람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였다. 아테네 철학자들은 차츰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고 마침내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도행전 17장 22절에서 23절을 보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며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섬기라고 담대하게 설교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하였으나 그가 전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테네뿐 아니라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였다. 그리스는 현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로서 예외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의 기독교는 동방정교회에 속하는 희랍정교회이다.
고린도 (Corinth) 운하
이탈리아 반도에서 아시아로 항해할 때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바로 고린도 지역이다. 1893년 완공된 고린도 운하는 현재 동쪽의 에게해와 서쪽의 이오니아해를 하나로 이어 준다.
서기 50년쯤 사도 바울이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당시 아테네는 학문과 예술의 중심이었다면 고린도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파트라스 (Patras) 항
순례단은 로마로 가기 위해 그리스 고린도 지역에 위치한 파트라스 항에 도착하여 3만 톤급 대형유람선인 불루스타호에 승선하였다. 지중해 일부인 아드리아해를 항해하여 이탈리아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항해하는 도중 한밤중이 되자 풍랑이 심하여 배가 요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도 바울이 당시 조그만 돛단배로 지중해를 건너 전도여행을 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었을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한 번 배를 탈 때마다 지금과는 달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뼈가 시리운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 추위와 배고픔과 파선의 위험을 겪으면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까를 묵상해 보니 그 위대한 신앙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졌다.
폼페이 (Pompeii)
순례단은 파트라스 항을 출발한 지 17시간 만에 이탈리아 남부 바리 항에 도착하였다. 바리 항에서 버스로 이동하여 다음 목적지인 폼페이를 향하였다. 폼페이로 가는 동안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서기 79년 8월,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팔로 도시 전체와 2만여 명의 주민이 함께 화산재에 파묻힌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도시이다. 폭발 이전에 몇 차례 경고를 했었지만 폼페이 사람들은 그것을 듣지 않았고,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이곳 사람들은 이집트에서나 볼 수 있는 미이라 형상이 되었다.
폭발 당시 폼페이는 로마 제국의 어떤 도시보다도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위락 시설로 로마 귀족들 사이에 인기 높은 리조트 도시였으며, 농업과 상업도 발달해 있었다. 현재 발굴된 유적들을 보면 성적으로 타락한 당시의 퇴폐적인 사회상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람들의 죄가 관영해질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던 것을 떠올리게 되는 현장이었다.
로마 (Rome)
기원전 735년 로물루스가 팔라띠노 언덕에 양치는 목동들과 함께 세웠다는 로마는 후에 거대한 로마제국의 중심이 되어 한때는 힘으로, 혹은 예술로, 혹은 종교로 세계를 지배하였다.
로마 시내로 들어서면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보이는 것마다 로마 시대의 유적이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역사적인 교회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로마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참믿음의 현주소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카타콤 (Catacomb)
카타콤은 로마인의 지하 무덤이었으나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숨어 지냈던 곳이다. 이 장소는 16-19세기에 걸쳐 재발견되었으며 귀족 가문의 소유였던 지하 매장실로부터 여러 층으로 된 긴 복도로 이루어져 있다.
카타콤에는 초기 기독교 예술의 귀중한 재산이 되고 있는 조각, 그림,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 로마 교회 크리스천들은 카타콤에서 장례를 지낸 후 시신을 안치한 주변에 성화를 남겨 놓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목자로 그린 성화도 많으며 크리스천을 물고기 모양으로 나타낸 표시도 발견하게 된다.
희랍어로 물고기라는 어휘 '익투스'(Ichthy)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의 머리글자와 같기 때문이다.
바티칸 (Vatican)
테베레 강은 로마시를 유유히 가로지르고 있는 강이다. 이 강을 건너 시원하게 뻗은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 가면 베드로 광장이 나온다. 주권독립국가인 바티칸 시국에 들어온 것이다. 바티칸은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가톨릭 교회의 총본산지이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아비뇽 유폐에서 풀려난 이래 현재까지 교황의 주거지가 되고 있는 바티칸 궁전은 1400여 개의 방과 예배당 가운데 교황이 사용하고 있는 곳은 얼마 안 된다. 대부분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어 바티칸 박물관이라고 불리우는데 바티칸 박물관은 르네상스 작품을 비롯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걸작들이 한 곳에 모인 서양미술품들의 보고이다.
베드로 대성당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 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서기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베드로 무덤에 성당이 건축되었다. 그 후 1200년이 지나 낡게 되자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개축이 시작되었다. 공사 기간 중 면죄부 판매와 종교개혁 파동으로 공사가 부진한 적도 있었으나 미켈란젤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작품이 진행되어 마침내 1626년 11월 교황 우르반 8세 때 준공되었다.
베드로 대성당은 건물을 짓는 데만도 100년 이상이 걸렸고 그 후 내부공사와 장식을 마무리하는 데 200년이 더 소요되었다.
성당 내부의 홀은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길이가 211.5m, 천정 높이는 45.44m이다. 대성당 중앙 끝의 창문에는 날개의 길이가 1.5m인 성령의 비둘기가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우상을 만들지 말며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조각상과 용이 곳곳에 그려져 있어 영적으로는 어두운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콜로세움(Colosseum)
콜로세움은 로마제국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큰 타원형 건물이다. 네로의 궁전 뜰에 있었던 인공연못에 AD 72년 건설을 시작하여 80년에 완성된 대형 원형 투기장 겸 극장이다. 80개 정도 되는 출구에 55,000명도 넘는 관객이 입장할 수 있다.
이곳에서 로마 사람들은 검투사와 맹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격투에 열광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대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던 순교의 현장이었다.
로마 황제들은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고,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했지만 이들도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기독교는 로마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을 거쳐 마침내 동방의 조용한 나라인 한국에까지 복음의 빛이 비춰졌던 것이다.
바울 순교 기념교회 (사도 바울 참수터)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던 이유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과 같이 당시 로마가 세계의 중심지여서 로마의 복음화는 곧 세계 복음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된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2년여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된다.
로마 서쪽 성문 밖에 사도 바울 순교 기념교회가 있다. 바울이 참수를 당할 때 그의 머리가 세 번 튀었고, 그 튄 장소마다 분수가 솟았다고 하여 오늘날 세 분수 교회라고도 불리운다.
순교 기념교회 입구에 들어서니 홀의 우측 벽면에 바울이 참수 당하여 순교하는 모습의 부조액자가 있었다. 교회 단 좌측에는 사도 바울이 참수될 때 그의 머리를 바치고 있던 대리석 참수대가 보존되어 있어 순례자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이스라엘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친 순례단은 텔아비브 공항을 출발하여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 모여 사는 대도시이다. 사도 바울은 2차와 3차 전도여행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방인들의 세계로 간주되었던 로마 제국에 속한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고대 아테네는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주도했던 도시였으며 그리스 전성기의 고전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도시 중심에는 높이 해발 150m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있다.
글 정권하
파르테논 (Parthenon) 신전
파르테논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자연적인 암반 위에 자리잡은 고대 그리스의 상징과 같은 건물이다. BC 447년 기공하여 BC 438년 준공한 이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를 섬기기 위해 만든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 건물 유적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1호로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비해서는 그 규모와 건축기술 및 건축된 연도를 비교해 볼 때 훨씬 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레오바고 (Aro pagos)
아레오바고 언덕은 아크로폴리스 옆에 있는 해발 113m의 나지막한 바위언덕이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서 그리스 북부지역인 마케도니아를 거쳐 서기 50년 경 아테네에 도착하였다.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였던 학문과 문화의 도시 아테네에서 사도 바울이 유명한 설교를 한 장소가 바로 아레오바고 언덕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아레오바고에 모여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고 즐거움이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아고라인 시장터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전하는 사람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였다. 아테네 철학자들은 차츰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고 마침내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도행전 17장 22절에서 23절을 보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며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섬기라고 담대하게 설교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하였으나 그가 전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테네뿐 아니라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였다. 그리스는 현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로서 예외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의 기독교는 동방정교회에 속하는 희랍정교회이다.
고린도 (Corinth) 운하
이탈리아 반도에서 아시아로 항해할 때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바로 고린도 지역이다. 1893년 완공된 고린도 운하는 현재 동쪽의 에게해와 서쪽의 이오니아해를 하나로 이어 준다.
서기 50년쯤 사도 바울이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당시 아테네는 학문과 예술의 중심이었다면 고린도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파트라스 (Patras) 항
순례단은 로마로 가기 위해 그리스 고린도 지역에 위치한 파트라스 항에 도착하여 3만 톤급 대형유람선인 불루스타호에 승선하였다. 지중해 일부인 아드리아해를 항해하여 이탈리아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항해하는 도중 한밤중이 되자 풍랑이 심하여 배가 요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도 바울이 당시 조그만 돛단배로 지중해를 건너 전도여행을 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었을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한 번 배를 탈 때마다 지금과는 달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뼈가 시리운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 추위와 배고픔과 파선의 위험을 겪으면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까를 묵상해 보니 그 위대한 신앙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졌다.
폼페이 (Pompeii)
순례단은 파트라스 항을 출발한 지 17시간 만에 이탈리아 남부 바리 항에 도착하였다. 바리 항에서 버스로 이동하여 다음 목적지인 폼페이를 향하였다. 폼페이로 가는 동안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서기 79년 8월,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팔로 도시 전체와 2만여 명의 주민이 함께 화산재에 파묻힌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도시이다. 폭발 이전에 몇 차례 경고를 했었지만 폼페이 사람들은 그것을 듣지 않았고, 미처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이곳 사람들은 이집트에서나 볼 수 있는 미이라 형상이 되었다.
폭발 당시 폼페이는 로마 제국의 어떤 도시보다도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위락 시설로 로마 귀족들 사이에 인기 높은 리조트 도시였으며, 농업과 상업도 발달해 있었다. 현재 발굴된 유적들을 보면 성적으로 타락한 당시의 퇴폐적인 사회상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람들의 죄가 관영해질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던 것을 떠올리게 되는 현장이었다.
로마 (Rome)
기원전 735년 로물루스가 팔라띠노 언덕에 양치는 목동들과 함께 세웠다는 로마는 후에 거대한 로마제국의 중심이 되어 한때는 힘으로, 혹은 예술로, 혹은 종교로 세계를 지배하였다.
로마 시내로 들어서면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보이는 것마다 로마 시대의 유적이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역사적인 교회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로마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참믿음의 현주소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카타콤 (Catacomb)
카타콤은 로마인의 지하 무덤이었으나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숨어 지냈던 곳이다. 이 장소는 16-19세기에 걸쳐 재발견되었으며 귀족 가문의 소유였던 지하 매장실로부터 여러 층으로 된 긴 복도로 이루어져 있다.
카타콤에는 초기 기독교 예술의 귀중한 재산이 되고 있는 조각, 그림,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 로마 교회 크리스천들은 카타콤에서 장례를 지낸 후 시신을 안치한 주변에 성화를 남겨 놓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목자로 그린 성화도 많으며 크리스천을 물고기 모양으로 나타낸 표시도 발견하게 된다.
희랍어로 물고기라는 어휘 '익투스'(Ichthy)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의 머리글자와 같기 때문이다.
바티칸 (Vatican)
테베레 강은 로마시를 유유히 가로지르고 있는 강이다. 이 강을 건너 시원하게 뻗은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 가면 베드로 광장이 나온다. 주권독립국가인 바티칸 시국에 들어온 것이다. 바티칸은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가톨릭 교회의 총본산지이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아비뇽 유폐에서 풀려난 이래 현재까지 교황의 주거지가 되고 있는 바티칸 궁전은 1400여 개의 방과 예배당 가운데 교황이 사용하고 있는 곳은 얼마 안 된다. 대부분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어 바티칸 박물관이라고 불리우는데 바티칸 박물관은 르네상스 작품을 비롯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걸작들이 한 곳에 모인 서양미술품들의 보고이다.
베드로 대성당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 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서기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베드로 무덤에 성당이 건축되었다. 그 후 1200년이 지나 낡게 되자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개축이 시작되었다. 공사 기간 중 면죄부 판매와 종교개혁 파동으로 공사가 부진한 적도 있었으나 미켈란젤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작품이 진행되어 마침내 1626년 11월 교황 우르반 8세 때 준공되었다.
베드로 대성당은 건물을 짓는 데만도 100년 이상이 걸렸고 그 후 내부공사와 장식을 마무리하는 데 200년이 더 소요되었다.
성당 내부의 홀은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길이가 211.5m, 천정 높이는 45.44m이다. 대성당 중앙 끝의 창문에는 날개의 길이가 1.5m인 성령의 비둘기가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우상을 만들지 말며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조각상과 용이 곳곳에 그려져 있어 영적으로는 어두운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콜로세움(Colosseum)
콜로세움은 로마제국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큰 타원형 건물이다. 네로의 궁전 뜰에 있었던 인공연못에 AD 72년 건설을 시작하여 80년에 완성된 대형 원형 투기장 겸 극장이다. 80개 정도 되는 출구에 55,000명도 넘는 관객이 입장할 수 있다.
이곳에서 로마 사람들은 검투사와 맹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격투에 열광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대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던 순교의 현장이었다.
로마 황제들은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고,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했지만 이들도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기독교는 로마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을 거쳐 마침내 동방의 조용한 나라인 한국에까지 복음의 빛이 비춰졌던 것이다.
바울 순교 기념교회 (사도 바울 참수터)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던 이유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과 같이 당시 로마가 세계의 중심지여서 로마의 복음화는 곧 세계 복음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된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2년여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된다.
로마 서쪽 성문 밖에 사도 바울 순교 기념교회가 있다. 바울이 참수를 당할 때 그의 머리가 세 번 튀었고, 그 튄 장소마다 분수가 솟았다고 하여 오늘날 세 분수 교회라고도 불리운다.
순교 기념교회 입구에 들어서니 홀의 우측 벽면에 바울이 참수 당하여 순교하는 모습의 부조액자가 있었다. 교회 단 좌측에는 사도 바울이 참수될 때 그의 머리를 바치고 있던 대리석 참수대가 보존되어 있어 순례자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