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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3] 러시아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 조효근 목사 (들소리 신문 발행인)
출처
날짜
2005년 3월 4일 금요일
조회수: 7251
|특|집|3| 러시아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러시아 정교의 이해

조효근 목사 (들소리 신문 발행인)


러시아 정교회는 제3의 로마를 자청하는 러시아 제국의 야망과 함께 로마 카톨릭과는 또다른 성격의 기독교이다. 러시아 선교에 관심 있는 이들은 그들의 기독교 1천년이 자부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러시아는 유럽적인 성격과 아시아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 시절에는 지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2,240만 km2 영토로서 미국의 3배, 중국의 2.5배, 인도의 7.6배, 한반도의 104배의 크기이다. 영토뿐 아니라 150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200여 종족의 결집체가 러시아임을 아는 이들은 그들의 결집력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스크바 크레믈린의 1547년 1월 17일, 이날은 이반 4세의 황제 등극의 날이었다. 크레믈린 궁 우스핀스키 사원에서 귀족들과 외국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총대주교 마까리가 이반 4세에게 황금의 관을 씌워주고 짜르라 호칭하였다. 짜르(러시아 표현은 짜리)는 황제로서 지상의 통치권과 천상의 통치권을 가질 뿐 아니라 서로마 교황권까지 함께 가진다는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하면 종교와 정치를 한손에 쥐고 휘두르는 권세자였다.

이반 4세는 당시 학덕이 탁월한 마까리 총대주교의 도움으로 제왕의 법도를 익혀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저들 러시아는 이 무렵 콘스탄티노플을 중심한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하자 동로마 기독교 종주의 위상을 러시아로 옮겨, 그들 동로마의 계승자로 제3의 로마를 자처한 것이다. 제1로마는 카톨릭의 터전이다. 제2로마는 동로마 또는 비잔틴 제국을 말한다.
16세기 수준에서 러시아가 자신을 제3의 로마로 자처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부심이다. 저들은 역사를 훌쩍 뛰어넘어 1917년 10월 혁명 곧 볼세비키 혁명으로 전 세계의 양분화까지 시도한 무모함과 방대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러시아 기독교는 동로마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카톨릭의 고난에 기초한 십자가 보다는 화려한 부활을 더욱 선호한다. 러시아 기독교는 그들 민족성과 함께 웅장하고 방대함을 가졌으나 '고난'에 기초한 신앙을 배우지 못했다. 볼셰비키 공산당 혁명을 종교적 의미로 해부하면 그것이 곧 메시아 운동 즉, 예수 재림 운동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서유럽에 대한 처절한 열등감 때문에 2천 년 동안 기다리던 예수가 재림하지 않으니 예수 재림의 이상을 만들자 했던 것이다. 그 이상을 세계 공산당운동으로 이루어 보고자 한 것이 러시아의 야심이었다.

1. 민족의 열등감과 기독교

러시아의 문명기는 키예프 루시 올레그 공국시대(AD 882-)부터 약 350여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고르 공후 치세에는 국력이 넘쳐 감히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 했다. 실제로 공격했었다. 키예프 루시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공물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고르 공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 올가는 세 살 난 아들 스바토 슬라브의 섭정자로 나섰다. 올가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고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환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 정교의 세례를 받았다.

올가의 개방적 태도는 러시아 전 국민에게 강한 거부감으로 나타났다. 슬라브 민족은 그들 고유의 원시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하늘의 빛의 신인 스바로그, 창조자인 다즈보그 , 천둥과 번개 또는 전쟁의 신 페룬, 바람의 신이며 무사들의 보호자인 스트리보그 등을 믿었다. 이는 민족의 신들로 그들 민족의 기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키예프는 기독교를 거부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그냥두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하며 접근하였으나 올가 섭정자는 국민의 거부감을 이유로 로마 카톨릭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것은 곧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었고 정교와 카톨릭 사이에 알력으로 발전한다. 그러는 사이 스바토 슬라브가 장성하여 모친 올가의 섭정을 물리치고 AD 962년 제4대 키예프 루시의 공후가 된다. 스바토 슬라브는 나라의 지경을 넓혀 제국을 형성할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전쟁을 좋아하는 스바토 슬라브가 전쟁터에서 죽은 후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왕위 계승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자 막내인 블라디미르가 스칸디나비아로 건너가 용병을 구해와 둘째 형을 죽인 큰 형 이야로폴그를 몰아내고 제6대 공후로 등극했다.

블라디미르는 확실한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이나 교활하고 음흉한 면이 있다고 알려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성자 블라디미르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그가 정치가로도 성공하고 나라와 종교를 위한 지도력을 크게 발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블라디미르는 교회를 많이 짓고 학교를 세우는 등 백성들의 장래를 위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리고 블라디미르는 비잔틴 제국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AD 989년 비잔틴 제국의 공주 안나와 결혼하고 정교회를 키예프 루시의 종교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블라디미르 대에 이르러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회 또는 러시아 정교회를 수립하는 명실상부한 기독교가 되었다.

뉴스

이삭 성당 전망대에서 바라본 상트 페테르부르그 시내 전경

2. 제3의 로마, 러시아 신앙

러시아는 15세기에 이르러서 크게 융성하였다.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 박물관에 가 보면 저들 러시아가 주변 세력들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영토를 넓히며 문화국가를 도모하고 나아가서 제국을 꿈꾸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러시아는 본질적으로 시샘이 많은 나라이다. 그래서 그들의 민족성을 동양적이라고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키예프 루시의 영광을 짓밟은 사건은 징기스칸의 유렵 진출 길목이 되어 몽고 타타르족의 지배를 받으며 수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서구 문물이 오고 가지 못하는 비운을 맞는다. 지금도 러시아가 일류 국가의 대열에 들지 못하는 이유를 징기스칸의 후손들이 서유럽 길목인 키예프 루시를 짓밟고 문명의 길을 차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치명적인 역사의 단절이었다. 문예부흥기(르네상스)에 참여하지 못한 러시아의 비운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그들의 저변을 살펴보면 신비하고 황홀한 민족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15세기말 이반 3세 시대에 이르러 러시아는 제국의 단계에 이른다. 오늘의 러시아 영토 대부분이 1505~1533년까지 모스크바에서 통치력을 발휘한 바실리 3세에 의해 정복한 것이며 아들 이반 4세에 이르러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러시아는 외형상 제국에 만족하지 않고 로마제국, 제 3로마가 되고 싶어 몸부림친다. 러시아인들의 기독교는 세계교회사 편에 의하면 선교사 키릴의 등장과 함께 기독교를 필요로하는 러시아의 지혜가 만난다. 키예프 루시가 안정기반을 갖출 때 그리스 정교가 러시아를 향하여 다가섰다. 화려하고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그리스 정교는 아름다움을 흠모하는 러시아인의 매력의 대상이었다. 그로인해 상류층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3. 새 러시아의 개척자 뾰트르 대제

피터, 러시아 발음으로 뾰트르라고 한다. 뾰트르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잃은 탓으로 크레믈린 궁 밖에서 자란 왕자였다. 그는 황제로서의 격식보다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궁궐밖 외국인 촌에서 살면서 러시아보다 훨씬 발전한 문명이 있음을 직감했다.
뽀트르는 1672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르이쉬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1696년 황제의 위에 오른 뾰트르는 외국과의 동맹을 맺고 또 구라파 문명의 유입을 위해서 유럽 여러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25세의 황제 뽀트르는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사용,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 방문에 나섰는데 그가 비록 변장을 했어도 7척의 거구와 돋보이는 용모로 말미암아 신분노출의 위험이 많았다. 행상인, 마부, 나팔수 등으로 신분을 철저하게 감추며 부하들을 이끌고 다녔다. 스웨덴을 지나 프로이센으로 갔는데 뽀트르는 포병 하사관으로 변장을 하고 프로이센 고위 포병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네덜란드에 가서는 목수로 자기 신분을 위장하고 배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해부학과 응용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보오르 하베의 외과 교실에서 해부학 강의를 받던 중 그 일행이 시체 관찰을 기피하자 그는 느닷없이'시체의 힘줄을 입으로 물어 뜯으라'고 명령을 내린 일이 있었다. 벌벌 떨며 명령을 실행하는 부하들을 보고 의사들도 뽀트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여행 14개월 되던 때 나라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귀국한다. 반란을 진압한 뾰트르는 러시아를 유럽에 뒤지지 않는 제국을 만들고자 결심하였다.

1703년 전리품으로 얻은 네바강 하구 늪지대를 관찰했다. 발트해를 전략적으로 장악하고 유럽으로 국력을 뻗어가려면 적격지라는 판단이 섰다. 비록 늪지대이기는 하지만 땅을 돋우고 잘만하면 러시아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다고 확신했다.

뾰트르는 1703년 즉시 공사에 착공하였다. 10년 공사를 하여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이룩하였으니 일명'유럽의 창'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제2의 파리로 칭함을 받았던 뽀트르 대제의 도시가 이루어진 것이다.
공산 치하에서는 한때 이 아름다운 도시가 '레닌 그라드'로도 명명되었으며 볼셰비키 혁명의 중심도시인 러시아 제2의 도시인 상트(聖) 페테르부르그는 뾰트르의 장엄한 의지에 따라 네바강 가에 세워졌다. 도시 건축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험난하고 거대한 대역사였다.

페테르부르그는 러시아의 수도로 유럽을 향한 전진기지로, 프랑스 파리를 그대로 모방한 제2의 파리로 러시아의 유럽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뾰트르 대제의 꿈은 척척 이루어져 갔다. 그의 로마노프 왕조 3백여 년, 볼셰비키 앞에 니콜라이 2세가 무릎을 꿇고 로마노프 왕조를 마감할 때까지 러시아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다.
뾰트르의 영웅적 시도는 교회가 분열되고 침체되는 상황까지 일거에 반전시켰다. 그러나 러시아의 오만은 세계를 향한 창을 열었지만, 여는 그 순간부터 문을 닫는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파리를 러시아에 옮겨 놓았다는 자부심에 찬 페테르부르그는 자유라고 하는 또 하나의 도그마를 해석해 내는 실력이 모자랐다. 지식에 쫓기고 문명으로 쫓기는 러시아는 혁명의 물결에 휘말린다. 프랑스 혁명기에 형성된 '자유'라고 하는 이상'이 러시아를 혁명의 시대로 이끌어 간다.

1825년 12월, 1613년에 세워진 로마노프 왕조의 영걸 뾰트르의 후예인 니콜라이 1세 즉위식 날인 12월, 당원들이 크레믈린 광장에서 대포를 쐈다. 그리고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크레믈린 궁을 장악하고 니콜라이 Ⅱ세를 축축하고 공산당 혁명을 성취하기까지 1백 년 가까운 길고 긴 혁명기에 휘말리게 된다.

4. 러시아 정교를 찾아서

필자는 러시아 기독교를 팔삭둥이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이는 저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순수와 신비성 앞에서 경의를 표한다. 러시아는 너무 순수하고 바보같아서 칼 마르크스의 유토피아에 뛰어들어 엄청난 희생을 당했다.

그러나 러시아 선교를 꿈꾸는 기독교는 먼저 겸허하게 '우리는 러시아를 모른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 중요한 것은 러시아 정교를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