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의 소식
제목
믿음으로 정도(正道)를 걸으니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쳐나요 - 박용욱 집사
출처
만민뉴스 제2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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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년 5월 28일 토요일
조회수: 14862
- 박용욱 집사 (울산과학대학 컴퓨터정보학부 교수, 남울산만민교회)
1995년 5월, 이모님의 소개로 초등학교 교사인 손미경 집사를 만나 결혼하였는데 서로의 직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 1년간 주말부부 생활을 하였습니다.
첫 딸 세빈이를 낳고 아내가 출산 휴가를 받아 경기도 송탄에서 같이 살면서부터 직장 신우회를 통해 알게 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지요.
영적 갈급함 속에 본교회로 인도받은 후
그 당시, 전자부품 연구소에 다니던 저는 출근해서나 점심 시간에도 근처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성전에서 혼자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포근히 감싸 주시고 저의 기도를 듣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싶고 성경의 난해구절들을 속 시원히 풀이 받고 싶은 영적 갈급함이 있었지요.
1996년 9월 어느 날, 조명자 집사님의 인도로 만민중앙교회 금요철야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생명력 넘치는 설교 말씀과 성전을 가득 메운 성도님들이 새벽 4시까지 충만하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습은 가슴이 터질 듯한 벅찬 감동을 안겨 주었지요.
얼마 후 저는 부산대 교수님으로부터 박사과정을 밟으며 자신의 일을 도와 달라는 제의를 받고 연구소를 퇴직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 2월,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근무하는 울산으로 내려와서 울산만민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건축 헌금을 드리고 영혼이 잘되어 가니
그 당시 개척 교회였던 울산만민교회는 성전 신축 부지를 매입한 후 건축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생명의 제단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연구소 퇴직금을 건축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이를 기뻐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축복을 날마다 더해 주셨습니다.
1년 동안 울산에서 부산으로 매일 왕복 세 시간씩 출퇴근하며 차 안에서 듣는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의 생명의 말씀은 영의 지식으로 급속히 쌓여갔습니다. 또한 금식과 기도로 나날이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러던 1998년 1월, 울산과학대학의 컴퓨터공학과에서 교수 채용이 있는데 한번 응시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원자 중에 대부분이 부산대학교 출신이라 균형 있는 채용을 위해서 타 대학 출신의 지원자를 뽑아야 한다며 대학 측에서 고심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산대학교 출신인 저는 조금 불안한 면도 있었으나, 예배 때마다 마음의 소원을 놓고 화상을 통한 당회장님의 「환자를 위한 기도」를 받으니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극적으로 대학 교수 임용의 기쁨을 맛보고
1998년 2월, 학교측에서는 6개 학과 중 5개 학과에 대한 5명의 선발을 마쳤으나 제가 지원한 컴퓨터공학과에 대한 2명의 결정은 미루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발표 일자를 두 번이나 연기한 끝에 발표가 났습니다.
"박용욱 교수님, 임용을 축하드립니다."
임용 소식을 들은 아내는 뛸 듯이 기뻐하였고, 저를 위해 기도해 준 교회 성도님들도 함께 기뻐해 주셨습니다.
발표 결과를 보니 더욱더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합격된 저와 다른 지원자는 A와 B로 전공 분야가 나뉘었는데, 부산대 출신 지원자가 많은 B분야에서는 순위는 낮지만 타대학 출신자인 지원자가 선발되었고, 제가 속한 A분야에서는 저를 제외한 많은 지원자가 타대학 출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산대 출신자인 제가 선발된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정도(正道)를 걸으니 축복이 넘치고
2년 후 재임용 평가 때가 되었을 때입니다. 평가 대상 교수들의 학과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대 평가를 할 수 없는 실정이라 대학 내에서 인간 관계 등이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술자리도 함께하면서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고 사랑의 충고를 해 주신 분들도 있었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술자리에 가지 않았지요.
오히려 근무가 끝나면 매일 밤 열리는 다니엘철야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또한 열심히 연구하며 미래를 짊어지고 갈 인재 양성을 위해 밤낮이 없었고, 학생들과의 상담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2000년 1학기 초,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신 말씀처럼 재임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할렐루야!
지금은 학교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학과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컴퓨터정보학부의 학부장으로 승진되는 축복도 받았습니다.
가정에도 치료의 역사와 강건한 축복이 임해
축복은 저희 가정에도 넘쳐났습니다. 둘째 아이 사무엘이 세 살 무렵, 온몸과 얼굴에 아토피성 피부염이 발병해 작정하여 매일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작정이 끝날 무렵에는 거의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믿지 못하고 약을 발랐던 부분만 매년 재발하였고, 회개한 후 무안단물을 바르고 당회장님의 기도를 받으니 깨끗해졌습니다.
또한 알레르기성 천식 증세도 작정 기도를 하며 당회장님의 기도를 받고나니 지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자녀들은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고 한 구절씩 암송하며, 말씀대로 행하기를 힘쓰니 담임 선생님이나 주변 엄마들로부터 착하고 반듯한 아이들이라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아내도 주님의 사랑으로 초등학생들을 지도하니 학부모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교사로 보람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며, 사랑으로 양육해 주시고 진액을 다해 기도해 주신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1995년 5월, 이모님의 소개로 초등학교 교사인 손미경 집사를 만나 결혼하였는데 서로의 직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 1년간 주말부부 생활을 하였습니다.
첫 딸 세빈이를 낳고 아내가 출산 휴가를 받아 경기도 송탄에서 같이 살면서부터 직장 신우회를 통해 알게 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지요.
영적 갈급함 속에 본교회로 인도받은 후
그 당시, 전자부품 연구소에 다니던 저는 출근해서나 점심 시간에도 근처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성전에서 혼자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포근히 감싸 주시고 저의 기도를 듣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싶고 성경의 난해구절들을 속 시원히 풀이 받고 싶은 영적 갈급함이 있었지요.
1996년 9월 어느 날, 조명자 집사님의 인도로 만민중앙교회 금요철야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생명력 넘치는 설교 말씀과 성전을 가득 메운 성도님들이 새벽 4시까지 충만하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습은 가슴이 터질 듯한 벅찬 감동을 안겨 주었지요.
얼마 후 저는 부산대 교수님으로부터 박사과정을 밟으며 자신의 일을 도와 달라는 제의를 받고 연구소를 퇴직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 2월,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근무하는 울산으로 내려와서 울산만민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건축 헌금을 드리고 영혼이 잘되어 가니
그 당시 개척 교회였던 울산만민교회는 성전 신축 부지를 매입한 후 건축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생명의 제단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연구소 퇴직금을 건축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이를 기뻐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축복을 날마다 더해 주셨습니다.
1년 동안 울산에서 부산으로 매일 왕복 세 시간씩 출퇴근하며 차 안에서 듣는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의 생명의 말씀은 영의 지식으로 급속히 쌓여갔습니다. 또한 금식과 기도로 나날이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러던 1998년 1월, 울산과학대학의 컴퓨터공학과에서 교수 채용이 있는데 한번 응시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원자 중에 대부분이 부산대학교 출신이라 균형 있는 채용을 위해서 타 대학 출신의 지원자를 뽑아야 한다며 대학 측에서 고심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산대학교 출신인 저는 조금 불안한 면도 있었으나, 예배 때마다 마음의 소원을 놓고 화상을 통한 당회장님의 「환자를 위한 기도」를 받으니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극적으로 대학 교수 임용의 기쁨을 맛보고
1998년 2월, 학교측에서는 6개 학과 중 5개 학과에 대한 5명의 선발을 마쳤으나 제가 지원한 컴퓨터공학과에 대한 2명의 결정은 미루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발표 일자를 두 번이나 연기한 끝에 발표가 났습니다.
"박용욱 교수님, 임용을 축하드립니다."
임용 소식을 들은 아내는 뛸 듯이 기뻐하였고, 저를 위해 기도해 준 교회 성도님들도 함께 기뻐해 주셨습니다.
발표 결과를 보니 더욱더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합격된 저와 다른 지원자는 A와 B로 전공 분야가 나뉘었는데, 부산대 출신 지원자가 많은 B분야에서는 순위는 낮지만 타대학 출신자인 지원자가 선발되었고, 제가 속한 A분야에서는 저를 제외한 많은 지원자가 타대학 출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산대 출신자인 제가 선발된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정도(正道)를 걸으니 축복이 넘치고
2년 후 재임용 평가 때가 되었을 때입니다. 평가 대상 교수들의 학과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대 평가를 할 수 없는 실정이라 대학 내에서 인간 관계 등이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술자리도 함께하면서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고 사랑의 충고를 해 주신 분들도 있었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술자리에 가지 않았지요.
오히려 근무가 끝나면 매일 밤 열리는 다니엘철야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또한 열심히 연구하며 미래를 짊어지고 갈 인재 양성을 위해 밤낮이 없었고, 학생들과의 상담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2000년 1학기 초,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신 말씀처럼 재임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할렐루야!
지금은 학교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학과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컴퓨터정보학부의 학부장으로 승진되는 축복도 받았습니다.
가정에도 치료의 역사와 강건한 축복이 임해
축복은 저희 가정에도 넘쳐났습니다. 둘째 아이 사무엘이 세 살 무렵, 온몸과 얼굴에 아토피성 피부염이 발병해 작정하여 매일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작정이 끝날 무렵에는 거의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믿지 못하고 약을 발랐던 부분만 매년 재발하였고, 회개한 후 무안단물을 바르고 당회장님의 기도를 받으니 깨끗해졌습니다.
또한 알레르기성 천식 증세도 작정 기도를 하며 당회장님의 기도를 받고나니 지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자녀들은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고 한 구절씩 암송하며, 말씀대로 행하기를 힘쓰니 담임 선생님이나 주변 엄마들로부터 착하고 반듯한 아이들이라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아내도 주님의 사랑으로 초등학생들을 지도하니 학부모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교사로 보람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며, 사랑으로 양육해 주시고 진액을 다해 기도해 주신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